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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핵은 국체' '미국의 장기적 위협'…북한은 정확히 알고 있다

북한이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을 혹평하며 거부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 간의 북핵 협상 동안 북한은 비핵화와 관련해 수많은 합의를 해 왔습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주변국들을 속여왔던 것일까요?
 
북한 핵실험

북한의 핵 개발, 진짜 목적은?

북한 비핵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온 질문 중의 하나는 북한의 핵 개발이 협상용이냐, 아니면 북한은 궁극적으로 핵 보유를 목표로 하고 있느냐 였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적대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북한이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얻기 위한 차원에서 핵을 활용하고 있다는 주장과, 북한은 여러 협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핵보유의 길로 갈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핵이 협상용이라는 주장은 여건만 조성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북한도 처음에는 명확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핵 개발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면서도 중간중간 비핵화 합의에도 응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핵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할지라도 핵 개발 초기 핵무기 완성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국제사회의 압력 속에 일부 보상도 해준다 하니 비핵화 합의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관련 합의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관련 첫 합의라고 볼 수 있는 것은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입니다. 남북 간에 맺어진 합의인데, 이 합의에서 남북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핵무기 제조 시설도 보유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1.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
2. 남과 북은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
3.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2년 2월 19일) 중에서>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는 이른바 제1차 북핵 위기 끝에 맺어진 합의입니다. 이 합의에서 북한은 영변 원자로를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대신, 200만 KW 발전 능력의 경수로를 제공받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해가기로 했습니다.

북한은 합의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겠다고 밝혀 비핵화 의지를 다시 밝혔습니다. 경수로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대가로 비핵화를 약속한 것을 보면, 핵을 협상 카드로 활용해 필요한 것을 얻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북미) 쌍방은 조선반도의 비핵화,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1) .... (중략)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시종일관하게 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북남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

<북미 제네바 합의(1994년 10월 21일) 중에서>
 
북미 제네바 합의가 결렬된 뒤 다시 불거진 북핵 위기를 거쳐 북핵 6자회담 틀이 마련됐습니다. 6자회담에서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마련됐습니다. 9.19 공동성명은 이후 BDA 사태로 공전되다 북한의 1차 핵실험 뒤 2007년 2.13 합의, 10.3 합의로 이어졌는데, 북한은 이 때에도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중유 등을 받는 대가로 비핵화를 약속했습니다.
 
1. (전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9.19 공동성명(2005년 9월 19일) 중에서>
 
2. .... (중략)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궁극적인 포기를 목적으로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을 폐쇄, 봉인하고 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IAEA 요원을 복귀토록 초청한다.

<2.13 합의(2007년 2월 13일) 중에서>
 
​​​​​​1. 한반도 비핵화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에 따라 포기하기로 되어 있는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을 불능화하기로 합의하였다. 영변의 5MWe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 및 핵연료봉 제조시설의 불능화는 2007년 12월 31일까지 완료될 것이다. ... (후략)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13 합의에 따라 모든 자국의 핵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2007년 12월 31일까지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0.3 합의(2007년 10월 3일) 중에서>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문턱에서 북한은 문을 넘지 않았습니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 검증 문제로 좌초했는데, 북한이 핵 검증에 필요한 시료 채취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핵 검증 문제를 놓고 현장 방문, 문건 확인,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는 허용하면서도 시료 채취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시료 채취 없이 검증이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시료 채취는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지 확인하는 진실의 관문으로 여겨져 왔는데, 북한이 진실의 문을 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물론 북한이 핵의 협상 가치를 좀 더 높이려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궁극적인 핵 보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했던 대목입니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협상 국면에서 북한은 다시 핵포기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 북한이 표명했다는 '한반도 비핵화'가 정말 핵을 포기하겠다는 뜻인지는 보다 정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를 보였나 - '쿨한 남북관계'론 ③)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018년의 화해 국면에서도 북한이 핵개발을 멈췄다고 볼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핵실험과 ICBM 발사 중지를 약속했지만 언제든 재개할 수 있는 것이었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시켰지만 다시 복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실제로 북한은 2022년 ICBM을 다시 발사하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복구시켰습니다) 북미 제네바 합의나 9.19 공동성명 당시에는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거나 불능화하는 등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들이 수반됐던 반면, 2018년의 국면에서는 실질적인 핵능력의 동결 내지 감소를 보여준 사례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2018년의 화해 국면에서도 북한이 핵능력을 꾸준히 증강시켰다는데 대체로 평가가 일치합니다.

일련의 북핵 개발 과정을 보면, 북한은 중간중간 비핵화 합의와 핵능력의 동결 내지 일부 폐기에 응하는 듯 했지만 꾸준히 핵개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핵개발 초기부터 궁극적인 핵 보유를 목표로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시간이 흘러 핵 능력이 향상될수록 궁극적인 핵 보유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 핵포기의 대가로 제시돼 온 여러 대안들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진행해 왔습니다. 대가를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통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지금까지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돼 온 북핵 해결 방안입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주요한 이유가 미국으로부터의 안보를 위한 것이니 북미 간의 근본적인 적대관계를 해소해 북한이 핵을 개발할 필요가 없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일정 규모의 경제지원도 들어가겠죠.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 달러를 만들어주겠다는 '비핵개방 3000'이나, 비핵화 협상 초기부터 경제지원을 적극 강구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 역시 북한의 핵을 어떻게 포기시킬지 '협상'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여건과 대가를 마련해주면 북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것입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김여정 "국체인 핵, 흥정물 아니다"

그런데, 지난 19일 나온 김여정의 담화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흥정할 것이 따로 있는 법, 우리의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짝과 바꾸어 보겠다는 발상이 … 아직은 어리기는 어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김여정은 핵을 국체, 즉 국가의 근간이자 본질이라고까지 표현했고, 흥정할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핵은 협상 대상물이 아니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북한의 궁극적인 핵 보유 의지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짝'과 바꿀 수 없다고 했으면, 혹시 확실한 안전보장과는 교환할 수 있을까요?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방안으로 제시돼 온 대표적인 주장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북미관계 정상화 같은 것들인데, 여기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물론 북한의 안보위협 경감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뤄진다고 해서 북한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담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라고 해서 미국이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미 간 외교관계가 수립된다고 해도 미국은 북한의 인권문제 등을 꾸준히 지적할 것이고, (미국은 한국의 인권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선별적인 경제제재 등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의 경제제재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적대정책을 버리지 못했다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안보위협 해소 문제는 국교 수립이나 협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북한이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 편입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미국과 적대관계가 아닌 나라들은 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미국으로부터 안보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 일본처럼 미국과 동맹인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미국과 동맹관계가 아닌 나라라고 해도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서 자유롭게 교류 협력을 추진하는 나라라면 안보에 심각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 트럼프 타워가 평양에 건설되고 미국인들이 평양에서 관광과 사업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되면 북한의 안보위협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려면 대외 개방이 이뤄져야 합니다. 외부와의 교류를 상당한 수준으로 허용하고 외부 정보의 유입도 허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사상이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김일성 일가의 나라에서는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적극적인 대외 개방이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외부 정보가 유입되면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대한 허구가 드러나고 김일성 일가의 절대적인 기득권에 균열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적극적인 대외 개방을 하지 못하고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 편입되지 못한다면 북한의 안보위협은 궁극적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대외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을까 - '쿨한 남북관계'론②)
 
북미

미국의 장기적 위협 거론하는 북한

북한도 아마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들어 북한에서는 '미국의 장기적 위협', '미국과의 장기적 대결'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의 장기적인 위협을 관리하고 그러한 위협을 억제하며 그런 속에서 우리 국익과 자주권을 수호할 전망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실제적인 능력을 공고히 하고 부단히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과도 상대해야 하며 그 이후 미국 정권, 나아가 미국 전체를 대상해야 한다."

<2020년 7월 10일 김여정 담화>
 
"미제국주의와의 장기적인 대결에 보다 철저히 준비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일치하게 인정하면서"

<2022년 1월 19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회의>
 
"김정은 동지께서는 누구든 우리 국가의 안전을 침해하려 든다면 반드시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국가방위력은 어떠한 군사적 위협공갈에도 끄떡없는 막강한 군사기술력을 갖추고 미제국주의와의 장기적 대결을 철저히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2022년 3월 25일 노동신문>
 
북한이 언급하는 '미국과의 장기적 대결', 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북미 간의 적대적 대립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북한의 인식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이 북한 체제의 경직성 때문이라는 것을 북한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은 어쨌든 북미 간의 적대관계는 계속되며 이에 따라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핵은 정권의 생존과 연결되는 만큼 '국체'라고 한 김여정의 언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도 간단한 결론을 위해 많은 길을 돌아왔습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핵 개발 초기 북한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북한이 핵을 궁극적인 보유의 대상으로 생각한지는 이미 꽤 됐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그거 당연한 것 아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여전히 한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정책 목표가 '북한 비핵화'로 돼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북한의 핵보유는 NPT 체제 위반이라는 점을 떠나, 우리 국익에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핵무기는 비대칭무기이기 때문에 재래식 무기로는 대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든지, 그것이 어렵다면 미국의 확장억제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어 안보 종속은 더욱 심화됩니다.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수 없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상황, 유엔의 대북제재는 상시화되고 남북 경협은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실질적인 대북정책은

북한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꾸준히 북한에 비핵화를 촉구하고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발전과 번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대북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수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적인 대북정책의 방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역대 정부마다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화려한 대북 구상을 발표했지만 한반도 상황이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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