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
짧고 굵게 식당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내 몸 하나 누울만한 멀-끔한 거실과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에서는 페루 동네가 한눈에 보였다. '페루의 서울대'인 카톨릭카 대학 전경이 한눈에 보였고 바로 아래에는 프랜차이즈 파파이스 치킨집에 매일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난 그 옆에 허름한 간판의 식당을 참 좋아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600원만 내면 '깔도'라는 닭국수를 먹을 수 있었는데, 한국의 백숙과 매우 비슷한 맛이었다. 일할 때 식당 사장님이 말동무도 되어주고 밥도 챙겨줬지만 도전자라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근심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1년 안에 사막 마라톤 4경기를 모두 완주하겠노라는 결심과 꿈을 이루기에 나는 그다지 용감한 사람도, 여유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고민이 깊어지고 한국이 그리워질 때면 그 식당으로 내려가 5솔짜리 '깔도'를 사 먹었다. (* '솔(sol)'은 페루 화폐 단위를 말한다.) 3솔을 더 주면 닭다리 하나를 국수에 얹을 수 있었는데, 간판 한번 쳐다보고 지갑 한번 쳐다보고 다시 간판을 쳐다보고는 항상 "쏠로 깔도(깔도만 주세요)"를 외쳤다. 면을 다 먹고 닭 국물을 후루룩- 마실 때 간판에 있는 닭다리 사진을 보며 닭다리도 먹은 셈 쳤다. "어차피 아는 맛인데 괜찮아."
그리고 밤이 되면 베란다 너머로 노랗고 둥그런 달이 떴다. 거실에 누워 달을 보면서 꿈을 꾸었다. 내 꿈은 당장 배를 채울 쌀을 사주지도 않았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가슴을 심하게 흔들었던 꿈같은 일을 현실로 이루고 싶었다. 그냥 꿈을 꿈으로 남기는 게 싫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중에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는다면 그걸로 만족하리라 싶었다. 그런 생각들과 거실을 비추는 달빛이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2 선물
#3 설렘
최강소방관 대회에 출전한 이 반장은 자기 차례를 1시간 앞두고 내게 말했다.
"이 반장아 너 말 잘했다. 누가 그러더라, 설렘이란 감정이 비싼 감정이래~ 어렸을 때야 소풍 가기 전날이나 짝사랑하는 애 쳐다만 봐도 막 문득문득 찾아왔는데, 나이 들면 앵간한 일엔 마음이 꿈쩍도 안 한다잖아. 그나마 비싼 돈을 들여야 비슷한 감정이 든데, 차를 사거나 해외여행 나가거나 이런 거. 이야~ 설레고 좋겠다. 난 네가 부럽다."
"아니!!~ 반장님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한 시간 있으면 저 모래통을 들고 계단을 뛰어올라 갈 생각을 하니까#&$@!;"
"응~ 안 들려~"
금쪽같은 조언을 마친 나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한 20년쯤 지나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회상하지 않을까. 같이 코 흘리던 지금 이 시절이 행복했다고. 설레었다고.
#4 마스크와 귤
"똑똑똑. 저기 삼촌!"
아침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노크와 함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남원에서 조카를 키운 적이 없는데 삼촌이라니. 너무 놀란 마음에 문을 여니 옆집 꼬맹이가 귤 한 봉지를 건네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쌩 가버렸다.
요는 이렇다. 소방서가 코로나로 회식이 취소되면서 회식비로 마스크를 사서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난 딱히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옆집, 윗집, 아랫집 20개씩 치킨 봉지에 넣어 문 앞에 걸어놨다. (집에 치킨 봉지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아이가 찾아온 것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귤을 하나씩 까먹다 보니 가슴이 몽실몽실했다.
예전에 대학교 화장실에서 누군가의 행복론을 본 적이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엄~~~~청 멀리 있다"라고. 그땐 큰 용변을 출력하면서 "음.. 그럴 수 있지."고개를 끄덕끄덕 했지만, 십 년도 더 지난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이 생긴 것 같다. 행복은 거리가 아니라 빈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 이런 작은 행복도 자주 느낄 수 있는 삶이라면 그럭저럭 행복한 인생 아닌가.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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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죄짓고 살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