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돈바스 침공 날, '역대급 흑자' 자랑한 푸틴…제재는 무의미한 걸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돈바스 침공 날, '역대급 흑자' 자랑한 푸틴

현지 시간으로 어젯(18일)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오랜 시간 준비해온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공습에 나섰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이번 전쟁은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앞서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할 경우 이 전쟁은 더 길어질 것이고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목격한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이 우크라이나에서 다시금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비극이 시작되기 직전 푸틴은 서방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 행위를 중단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선 인플레이션과 실업, 경제 전망 위축 등을 유발하며 자충수가 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 중간에 눈길을 끈 대목이 있었습니다.
 
"Russia withstood the unprecedented pressure. Situation is stabilising. Rouble exchange rate is back to early February level and supported by a strong balance of payments. As of the first quarter, surplus of the current account is above 58 billion (U.S.) dollars. And it is a historic maximum"

즉, 러시아는 서방 세계와 달리 전례 없는 제재를 잘 견디고 있다는 내용인데 특히 우려되는 건 러시아가 1분기에만 경상 수지 580억 달러 규모의 역대 최고 수준의 흑자를 기록했다는 부분입니다.
 

열린 뒷문 덕에 예상됐던 흑자

사실, 러시아가 전례 없는 제재 속에서도 역대급 흑자를 기록할 것이란 예상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한 달 전 SBS 8뉴스는 원유‧가스 수출로 사실상 제재의 뒷문이 열렸고, 그 결과 러시아가 올 한 해에만 2천억 달러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것이란 내용을 국제금융협회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트위터를 인용해 보도한 바 있습니다.

▶ 러 국가부도 임박?…원유·가스 수출로 제재 뒷문 열려

이런 배경에는 독일 등 유럽 연합의 상당수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높은 에너지 의존도(원유, 천연가스 등)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브뤼셀에 있는 유럽의 경제 분야 싱크 탱크인 Bruegel 소속의 한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EU가 개전 이후에도 천연가스와 석유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면서 매일 8억 유로, 우리 돈 1조 원을 러시아에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한 적도 있습니다.

'이미 어지간한 러시아의 기업과 은행에 대한 제재가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받는다는 걸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의 주 결제 채널인 러시아 스베르방크와 가즈프롬방크는 아직 제재 대상에서 빠져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입니다.(스베르방크는 러시아 은행 업무 비중의 약 40%를 차지)
 

뒤늦은 후회

역대급 흑자를 기록했다는 건 전례 없는 금융 제재의 1차적 효과를 상쇄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러시아를 향한 금융 제재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루블화의 가치를 휴지 조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다면 해당 국가는 존속할 수 있지만 그 신뢰마저 무너졌을 때는 국가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재 초기 루블화의 가치는 40% 가까이 폭락했고 이 과정에서 뱅크런 현상이 러시아 곳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금리를 2배 이상 올리고 개인의 외화 인출량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러시아 내부는 정상 국가의 모습과는 동 떨어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내부의 혼란으로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가 먼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서방의 비웃음 섞인 예상들도 나왔습니다.

생생지구촌 03. 뱅크런

하지만, 유럽에서 받은 막대한 에너지 수출 대금으로 역대급 흑자를 기록하면서(금융 제재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외화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루블화의 가치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즉, 제재의 1차 목표 달성이 물 건너 간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유럽 연합 국가 중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인 독일은 최근 "러시아와 교역하고자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했던 것이 큰 실책이었다."라고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주 뒤늦은 후회입니다.
 

제재의 효과는?

지금까지의 논의는 제재가 당장 효과를 내기는 어려워졌다는 뜻이지 제재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금융 제재는 물론 미국 주도의 수출 제재(반도체 등)도 있는데, 이로 인해서 조만간 러시아의 생산 공장들이 멈추고 철도와 비행기 등 기간산업도 차례로 영향을 받게 될 걸로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예측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의 국영철도회사인 러시아철도는 최근 디폴트 판정을 받았는데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 기업의 첫 디폴트 사례였습니다.

이렇게 러시아 실물 경제를 뒷받침하는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수록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수출로 벌이들인 부를 우크라이나 침공이 아니라 자국 경제를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미국이 최근 밝힌 제재의 방향성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실제로, 지난 12일 대러 제재를 총괄하는 미 재무부의 부장관 월리 아데예모는 "러시아의 금융 시스템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보다는 자국의 경제를 부양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게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결국, 이런 제재로 인해 언제쯤 러시아가 손을 들고 침공 행위를 중단할지가 쟁점인 것입니다. 만약 동부 돈바스를 향한 러시아의 더 잔혹해진 군사작전이 모두 다 끝난 뒤까지도 제재가 효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건 곧 실패를 의미합니다. 제재의 목적은 러시아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압박을 느낀 러시아가 침공 행위를 중단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부 돈바스 침공 당일 국제사회의 제재를 비웃으며 역대급 흑자를 푸틴이 자랑한 건 서방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남은 시간 싸움에 자신이 있다고 선전포고를 한 건 아닐까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