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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김원봉, 윤봉길 의거 비판 vs "통합 위해 노력"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임시정부 사료' ②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소장 김동길)가 공개한 사료 중에는 약산 김원봉이 1944년 중국 정부 실력자와 만나 나눈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김원봉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을 조직하는 등 무장 투쟁에 앞장섰지만 해방 후 월북한 전력 때문에 논란이 돼 왔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의 이번 사료 공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인데, 김원봉의 대화 기록에서는 당시 임시정부 내 당파 갈등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의열단 초기 단원들 사진. 맨 오른쪽이 김원봉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김원봉, 윤봉길 의거 비판…"진정한 혁명가는 쓰지 않는 수단"

김원봉이 만난 중국 정부 실력자는 국민당 중앙비서장이던 오철성(吳鐵城, 우톄청)입니다. 우리의 여당 사무총장 격인데, 오철성은 그 당시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담당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1944년 2월 28일입니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임시정부에 들어와 광복군에 합류한 상태였고,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국방장관)을 맡기 두 달 전입니다.

중국 국민당 중앙비서장을 지낸 오철성 (출처=바이두)

김원봉은 오철성과의 대화에서 백범 김구가 주도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김원봉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반일 황족 정권을 계승한 것도, 망국 후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자유 정부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독립당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정치 기구로, 소수의 한국 교민을 대표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독립당은 백범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을 말합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과 김원봉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김원봉은 이어 "20여 년 동안 독립당은 광복 운동에 대해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체적인 혁명 전략도 없었다"고 폄하했습니다. "일제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이 한때 파문을 일으켰지만, 이는 교묘한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으로 진정한 혁명가는 쓰지 않는 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던 시라카와 대장이 죽은 사건을 말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백범의 부탁으로 거사에 나섰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김원봉이 비판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일본은 조직적인 국가로, 중요 인사 한두 명이 암살됐다고 국책을 바꾸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김원봉과 오철성의 대화 기록. 김원봉이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 즉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언급하며 "교묘한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출처=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창설해 23차례나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영화 '암살'에도 등장했듯 일제 요인 암살의 시조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김원봉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판한 이유는 뭘까요.

김원봉은 오철성에게 임시정부의 인사 문제와 자금 배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이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을 중용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급한 자금을 조선민족혁명당에 나눠주지 않고 있다는 취지입니다. "독립당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기고만장하다"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속한 조선민족혁명당에도 별도의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오철성에게 요구했습니다.
 

김원봉 연구 학자 "통일되고 조직된 힘 필요성 강조한 것"

김원봉과 오철성의 대화 기록에 대해 김원봉 연구 학자 중 한 명인 밀양 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님이 입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래는 입장문 전문입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이 알려져 국민대표회의(1923년)가 열렸다. 임정 개조, 임정 폐지까지 논의되면서 많은 단체와 사람이 임정을 떠났고, 임정은 작은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하여 명맥만 유지하였다.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경제적 어려움이 나아졌을 뿐이었다. 중일전쟁 후 충칭에 정착하며 5인의 집단 지도 체제가 아닌 주석제(김구)로 전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조소앙·지청천 등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설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의 세력이 1942년에 통합, 임시정부의 세력도 확대되었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약산 김원봉

오철성과의 대화의 요지는 그 이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의 통합이 처음 논의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을 위해 김원봉이 오철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약산의 발언이 의거를 폄하하는 듯하나, 이는 의열단을 통해 몇몇의 희생으로 일제가 무너지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윤봉길과 같은 공격으로는 일본이 붕괴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한국독립당의 무능함과 통합 당시 거론되었던 여러 사실들에 대한 언급은 결국 민족혁명당의 입장에서 통일전선이라는 민족적 대화합을 위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통합 의지를 보이지 않아(활동 자금도 민족혁명당에는 분배되지 않아 50만 위안을 빌림) 중국 국민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뜻이 대화록의 요지이다. 내부적으로도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정당 등이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고 있어 한국독립당은 그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는 게 약산의 견해이다.

오철성 문건의 요지는 '약산은 여전히 한국독립당과 통합할 의사가 있고,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사이에서 중국 국민당이 올바른 판단과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금을 운용할 때 실상을 잘 분별하고 중앙정부의 대처 방안을 통일하여 활용해야 함을 국민당에 충고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 이후 임시정부는 주석-부주석제로 전환, 약산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을 지휘하였다.

국민당은 많은 대원들을 팔로군으로 보낸 약산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금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산이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통합을 추진한다는 오철성의 판단이 중국 정부에 전해졌기 때문에 1944년의 정치 체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대화록은 약산이 김구 또는 윤봉길 의거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몇몇의 희생이 아닌 통일되고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민족 운동이 통합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워 많은 양보를 하면서까지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는 약산의 의지가 더 돋보인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약산의 노력이 처절할 정도로 느껴지는 대화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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