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단독][월드리포트]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 비판' 문건 공개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임시정부 사료'①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올해는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진 지 103주년 되는 해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과 김동길 교수가 이끄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가 새로운 사료들을 다수 공개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들은 1940년대 자료들인데, 이 중에는 임시정부의 내부 분열을 보여주는 문건들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백범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과 약산 김원봉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항일 노선과 사상적 차이,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제공하는 활동 자금 배분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의 관심사는 권력 쥐는 것"


이런 갈등은 1943년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안원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의 아들로,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이후 임시정부의 외무부·선전위원회 소속으로 대외 업무를 맡았습니다.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43년 3월 15일 중국 충칭에 있던 미국대사관에서 만났습니다. 논의 주제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정당 재편이었습니다. 당시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된 이후였으며,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시정부에 참가한 상태였습니다. 안원생은 한국독립당 소속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조카 안원생의 어린 시절 모습 (출처=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원생은 이 자리에서 김원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누구도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인 김약산(김원봉)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소비에트 노선을 따라 조직됐고 정당의 명목상 당수는 김규식이지만 실제 통제권은 총서기인 김약산에게 있다", "김약산의 주 관심사는 자기 손에 권력을 쥐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안원생 "김원봉, 극우 비밀 조직 지원받아…기회주의자"


안원생은 임시정부 내부의 당파 분열도 미국대사관 측에 소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중국 국민당의 지지와 원조를 받고 있는 반면, 김약산 조직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군(軍)의 지지와 원조를 받고 있다"고 안원생은 전했습니다. 안원생은 이어 중국 군 조직 중에서도 '남의사(藍衣社, Blue Shirts Society)'를 김약산에 대한 자금줄로 지목했습니다. 남의사는 중국 국민당 산하 비밀 정보기관의 이름입니다. 국민당 반대파에 대한 백색 테러와 숙청, 암살 등의 임무를 자행했는데, 국민당 제복의 색깔이 짙은 푸른색이어서 남의사라고 불렸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엔 '삼민주의 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됐습니다. 이 조직은 철저하게 우파 정신으로 무장돼 있었으며 중국 공산당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안원생은 "김약산은 공산주의자거나 적어도 공산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김약산(김원봉)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데 대해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록 일부. 안원생이 김원봉에 대해 '기회주의자
▲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록 일부. 안원생이 김원봉에 대해 "기회주의자"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출처=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안원생은 "진정한 목표는 대한민국의 독립이기 때문에 두 정당(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차이를 덮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합의 장애물로 두 정당이 서로 다른 중국 조직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통합은 이뤄질 수 없으며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는데, 이럴 경우 "김약산 조직은 활동 기반을 잃게 되고, 필연적으로 중국 후원자들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안원생은 그러나 "임시정부가 언제 김약산과 그 소속 정당(조선민족혁명당)에 동등한 발언권을 내줄 것인가"라는 미국 서기관의 질문엔 "김약산 측은 동등한 권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통제권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해, 김구 계열이 김원봉 계열에 동등한 권한을 주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두 세력의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약산 김원봉

김원봉 연구학자들 "김원봉은 실용적 민족주의자"


김원봉 연구학자들은 김원봉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 "김원봉은 조국 독립만 쟁취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족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해방 때까지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가지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서 항일 투쟁에 유리한 현실적인 정치 행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 공산당으로 합류할 때, 김원봉은 본진을 데리고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 들어간 것도 김원봉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한 사례로 꼽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타깝게도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습니다. 승인을 받았다면 해방 직후 한반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과 미국 정부의 자료에는 임시정부의 내부 분열이 한 원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분열하지 않았어도 국제 정세장 승인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주된 해석입니다. 다만, 이런 내부 분열이 열강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빌미를 제공했을 수는 있습니다. 열강들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 임시정부 내 다른 내부 갈등 사례와 이에 대한 김원봉 연구 학자들의 입장에 대해선 또 다른 사료를 통해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