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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7살 아들을 잃은 아빠가 밤마다 붕괴 현장을 찾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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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막에서 겨울을 보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안 모 씨는 광주 아파트 붕괴 현장에서 매형의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스팔트 길바닥 위 임시 천막에서 겨울을 보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체육관 시설물을 납품하던 생업도 모두 제쳐뒀습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피해자 가족 대표를 맡게 됐습니다. 그런 안 씨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천막 주변을 한참 서성인 한 중년 남성이 있더랍니다. 으레 이곳 주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기엔 사고 직후부터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렀습니다.
 
"누군지 몰랐어요. 아는 체를 하시길래 물었더니 '내가 그 학동 참사 아빠 된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광주 건물 붕괴 사고
 
'학동 참사 아빠.' 1년도 채 안된 일입니다. 2021년 6월 9일 오후 4시 23분. 광주 학동에서 재개발을 위해 철거하던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붕괴 조짐을 느낀 작업자들은 미리 대피했지만, 건물은 도로를 덮쳤습니다. 9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였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17살 고등학생도 희생됐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밤 11시가 돼도 잠이 안 와 나와보신 대요. 그런데 가까이 오지는 못하세요. 그때 사고도 그분들한테 정말 날벼락이었잖아요. 이번 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난 건데, 또 다른 아픔인 거예요."
 
안 씨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며칠 후, 현장에서 '학동 참사 아빠'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들은 대로 아버지는 사고 현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처음 이곳을 찾은 건, 사고 당일 밤 11시였습니다. 믿기 힘든 광경을 멍하니 보다 한 분이라도 살아서 구조될까 싶어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현장을 찾습니다. 한밤 중 집에 있으면 가슴이 막혀서 못 버티고 뛰쳐나오는 겁니다. 악을 쓰며 울고, 걷고 또 걷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 천막 안에는 못 들어가겠어요. 내가 울면 같이 울까 봐요."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싶지만 천막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학동 참사 아빠'는 안 씨와 자주 통화하며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주로 이야기하고 조언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 또 다른 붕괴 사고로 되짚게 된 지난 7개월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시간이 갈수록 몸과 마음에 고통이 쌓여요. 참사 당하고, 그다음엔 '갑질' 당하고"
 
학동 참사의 책임을 규명하는 수사는 지금도 한창입니다. 경찰은 최근까지도 현대산업개발 임원을 불러 조사했습니다. 현대산업개발 측은 대형 로펌을 선임해 수사와 피해 보상 등을 대응하고 있습니다. 17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로 피해 가족들만 모아도 수 십 명입니다. 아버지는 대형 건설사들의 작전을 '시간 끌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대형 건설사들은 산업재해를 전담하는 부서도 있고, 쉽게 말해 '노하우가' 있다. 시간을 끌며 어르고 달래고 재촉하는 동안 유족들은 점점 지친다"고 설명했습니다.
 
신정은 취재파일용
 
"우린 다 처음 겪는 일인데, 아니 애당초 겪어선 안될 일인데"
 
학동 참사 피해자 측 변호인은 피해 가족들이 지금은 울어도 합의를 논하게 될 땐 피눈물을 흘린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 나서 다른 나라 법과 판례까지 공부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사의 경우 1억 남짓 위로금으로 합의를 유도하는데, 미국의 경우 100억 가까이 된다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벌금은 수천 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감히 부실하게 공사할 엄두도 못 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재판장에 가면 많아야 1, 2억이니 그것보다 더 많이 줄게' 식으로 합의를 시도하니 아주 돌아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지난해 6월 미국 플로리다의 12층짜리 콘도가 무너져 98명이 사망한 사고 기억하실 겁니다. 붕괴 원인 등 조사로 실제 재판은 2023년 3월에야 열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지난해 열린 관련 청문회 자리에서 한 판사는 "피해자와 가족들은 최소 1억 5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1억 5천만 달러는 우리 돈 1,809억 7,500만 원입니다. 이마저도 소송 비용을 뺀 값이라 실제 재판에선 더 늘어날 것이며, 벌금은 별개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지난해 산업 재해로 사망한 사고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62%가 벌금형으로, 벌금액은 평균 654만 원에 불과했고 합의금도 몇천만 원으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리고 판결문엔 다소 낮은 양형의 이유로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다"는 설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 ▶관련 기사 : 고 김용균 3주기…"여전히 일터에서 죽어도 죗값 650만 원")
 
광주 아파트 공사장 붕괴 현장
 
"우리가 더 애써야 했는데, 그때 세상을 못 바꿔 미안해요"
 
학동 참사 유족들은 아파트 붕괴 피해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좀 더 싸우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때 세상을 못 바꿔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났다"고 생각했단 겁니다. 학동과 화정동 붕괴 피해자 가족들은 서로 연대하며 사고 수습을 위해 함께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최선을 다해 싸워서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말합니다. 허나 앞으로 지난(至難)한 시간을 견딜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오롯이 맡길 수 없습니다. 사고 일주일 후 광주 현장을 찾은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말을 '박제'하며, [취재파일]을 마무리합니다.
 
정몽규 HDC그룹 회장

"지난 여름과 올 1월 11일 날의 사고 때문에 저희가 광주에 이렇게 커다란 누를 끼치게 돼서 책임지는 차원에서 사퇴하게 됐습니다. 사퇴하지만, 그 책임이 면해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걸 약속을 드리고 유가족 분들에게도 제가 사고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걸 약속 드렸습니다…(중략) 다시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꼭 약속 드리겠습니다."
 
신정은 취재파일용
(도움 : 박예린 수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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