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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아플 때 먹는 흰죽이 크리스마스 특별식? (ft. 핀란드 이야기)

[인-잇] 아플 때 먹는 흰죽이 크리스마스 특별식? (ft. 핀란드 이야기)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SBS 뉴스

작성 2021.12.24 09:4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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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메뉴>
- 잿물에 담가 놓은 생선
- 무로 만든 캐서롤
- 깍둑 썰어놓은 순무 샐러드
- 건포도 시럽을 얹은 쌀죽

이 음식 리스트를 보고 식욕이 돋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 사람 중에서는. 그런데 핀란드 사람들은 다르다. 이 음식들은 핀란드 사람들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이다. 핀란드 음식이 원래 소박한 편이지만 가장 화려하게 꾸민다고 하는 크리스마스 만찬도 화려함에서는 역시 살짝 비껴 있다.

핀란드에 와서 처음 맞았던 크리스마스 날, 만찬에 초청받자 내심 기대감이 생겼다. 산타클로스의 나라인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성찬이니 왠지 대단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차려진 상을 마주하니 실망감이 몰려들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음식이 모두 칙칙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크리스마스 음식을 대표하는 뿌리채소로 만든 캐서롤은 무채색, 오븐에서 오래 익힌 카렐리얀 스튜(이전 글에서 소개함)는 갈색, 그렇다 보니 크리스마스 음식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분홍색 햄마저 그 빛이 바래 보였다.

빨간 순무로 만든 '로솔리 샐러드(깍뚝 순무 샐러드)'가 그나마 빛깔을 내고 있었다.
그나마 선명한 색깔 음식을 꼽는다면 빨간 순무로 만든 로솔리(rosolli) 샐러드, 소금에 절인 오렌지색의 연어회와 글료기라 불리는 적포도주를 데운 크리스마스 음료 정도였다. 로솔리도 차라리 빨간 순무만 썰어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린 청어와 합쳐 샐러드를 만드는 경우엔 우리 입맛에 안 맞기 십상이다. 소금에 절인 연어 역시 우리가 아는 연어회와는 식감이 달라 익숙한 맛은 아니었다. 조금씩 내 입맛을 벗어나는 '풍요 속 빈곤'의 향연 속에서 그나마 반가운 음식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흰 쌀죽이었다.

'맙소사…. 한국에서는 아플 때 먹었던 흰죽이 여기서는 크리스마스 음식이라니…'

그래도 익숙한 음식이라 안심하며 먹으려는데, 옆에서 짙은 갈색의 시럽을 건넨다. 건포도 등 말린 과일로 만든 단맛이 나는 시럽이다. 크리스마스 때는 이런 시럽을 곁들여 먹는 게 전통이란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

조금 의심은 갔지만 그래도 시럽을 부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밥을 설탕물에 말아먹는 바로 그 맛 아닌가. 그제서야 핀란드 사람들이 내가 한국에서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었다고 얘기할 때마다 질색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 나라이건 주식에 설탕을 넣는 건 '유죄'다.

크리스마스에 먹는 핀란드 음식. '리시푸로'는 쌀과 우유에 계피, 시나몬, 설탕, 등을 넣어 끓인 달달한 쌀죽이다.
쌀죽 속에 통아몬드를 숨겨 놓기도 하는데 아몬드를 먹는 사람에게는 다음 해에 행운이 온다고 한다.
쌀죽을 먹을 때는 재미있는 트릭이 하나 숨어있다. 로마인들이 음식에 행운의 콩을 숨겼던 것처럼 핀란드인들은 크리스마스 죽에 아몬드 하나를 숨긴다. 이 한 알의 아몬드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다음 해의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전해진다.

믿었던 쌀죽까지 보기 좋게 예상을 벗어난 뒤,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핀란드 크리스마스 음식은 내게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음식이었다. 맛은 보통 후천적 미각과 타고난 미각으로 나뉜다. 타고난 미각은 선험적 경험 없이도 본능적으로 미각이 자극되지만, 후천적인 미각은 여러 번 경험한 후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지금은 나도 크리스마스철이 다가오면 핀란드 사람들처럼 크리스마스 음식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변했다. 다행히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음식은 이웃 나라 노르웨이의 양 머리 요리인 스말라호베(Smalahove), 삭힌 홍어를 능가할 정도로 악취가 심한 스웨덴의 청어 발효 요리 수르스트뢰밍(surstromming) 정도의 고난도 음식은 없다.

올해는 핀란드에서 최고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내놓는다는 한 레스토랑에 가 보았다. 헬싱키를 조금 벗어난 투술라(Tuusula)라는 곳에 있는 크라피호비(Krapihovi) 레스토랑은 1973년 이래 매년 크리스마스 만찬 뷔페를 제공하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리추얼(ritual)'처럼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어릴 때 부모님 손잡고 왔던 곳을 자신의 아이들 혹은 손주와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이 곳 음식도 역시 혀를 즉각 자극하는 얕은 맛이 아니라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깊은 맛이 일품이다. 맛을 내는 데는 더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빼기도 있으며 소금과 후추 만을 사용해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핀란드 최고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길 수 있다는 크라피호비(Krapihovi) 레스토랑의 모습. 절인 청어와 훈제 연어. 그리고 다양한 해산물들. 대추 케이크와 생강 쿠키.
'핀란드 사람들은 왜 이런 음식을 크리스마스에 먹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관련된 인문학적 질문일 수 있다.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핀란드의 전통 추수 축제인 케크리(Kekri)와 북유럽 바이킹의 태양 숭배 축제, 그리고 기독교의 영향까지 모두 합쳐 이뤄졌다. 케크리는 11월 말 뿌리채소의 추수가 끝날 무렵 한 해 농사의 끝을 경축하는 잔치인데 다음 해 봄이 되기 전까지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겨울잠을 자는 곰이 마지막으로 많은 음식을 먹고 잠에 빠지는 것처럼 핀란드 사람들도 곡식이 부족해지는 겨울을 대비해서 이날 배가 터질 정도로 많은 음식을 먹는다.

케크리의 대표적 음식은 신선한 뿌리채소를 갈아서 구운 캐서롤과 오븐에 구운 햄이다. 햄은 축제 3개월 전에 햄으로 지정된 돼지 한 마리를 정성껏 살찌워 도축 후 만들어진다. 케크리 날엔 음식을 충분히 만들어 놓는데, 먹고 남은 음식을 밤새 놔두면 조상이나 다른 영혼이 와서 이 음식을 먹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은 음식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핀란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살짝 바뀌어 산타클로스를 돕는 엘프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둔다고 한다. 케크리 명절 때는 가축에게도 특식이 제공됐는데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도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다.

(왼쪽부터) 뿌리채소인 무, 감자, 당근으로 만든 '캐서롤'. 크리스마스 만찬의 주인공 '햄'.
핀란드에서 크리스마스는 요울루(joulu)로 불린다. 이 단어는 '태양의 큰 원'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 바이킹 단어 'hjul'에 기원한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바이킹족들은12월 동지가 지나면 태양이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이 잔치의 영향으로 지금도 북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모두 이 단어와 연관된 Jul(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jól(아이슬란드어), jõul(에스토니아어)로 부른다.

이름이 바뀌고 전통도 조금씩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과식하는 풍습'이다. 케크리나 바이킹족의 잔치처럼 크리스마스 역시 핀란드 '국민 과식의 날'이며 이 시즌이 끝나면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사람이 많다. 명절을 보내는 지구촌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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