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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핀란드의 '미리'크리스마스 (feat. 글료기 만들기)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걸까? 이 같은 궁금증을 유머러스하게 '화장실 휴지'에 비유한 사람도 있다. 왜냐고? 휴지를 많이 쓸수록 휴지심이 빨리 돌아가는 것처럼 세월도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거라고.

2021년 신년 폭죽을 쏘아올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이다. 연말이라면 크고 작은 모임이 많기 마련이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모임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크리스마스 전등 점화식을 보러 헬싱키 시내를 찾았다. 1949년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헬싱키시의 크리스마스 전통이다. 연례 전통 크리스마스 마켓도 같은 날 문을 열었다. 작년에는 인원 제한으로 온라인을 통해 전등 점화식을 지켜본 사람이 많았지만, 올해는 누구나 오프라인으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작년에 취소됐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도 올해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퍼레이드에는 견공 100마리와 말 8마리도 함께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전등 점화식을 시작으로 핀란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크리스마스 전등 점화식이 열린 헬싱키 시내의 모습. (사진=Ants Vahter , Dorit Salutskij)
견공과 말도 함께한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사진=Ants Vahter , Dorit Salutskij)

'작은 크리스마스'라는 뜻을 지닌 '삐꾸요울루(pikku joulu)' 파티도 지금이 시즌이다. 이 파티는 11월~12월 초에 보통 열리는데, 그야말로 '크리스마스 전초전 파티'라고 할 수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인들과 친교를 나누는 핀란드판 망년회이기도 하다.

수년간 지켜본 바, 이 삐꾸요울루 파티는 핀란드인들의 정신 건강에 꼭 필요한 중요한 연례 행사다. 11월과 12월 초는 눈이 쌓이지 않아 1년 중 가장 날이 어두운 기간인데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이때 이만한 항(抗)우울 성 이벤트가 없다. 덕분에 사람들은 어두운 바깥 날씨와는 큰 상관없이 11월부터 파티 기분에 취해 살아갈 수 있다.

삐꾸요울루는 회사에서도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다. 바삐 살아온 1년을 마감하는 종무식과 망년회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사측은 풍성한 파티를 제공함으로써 1년 동안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핀란드에서는 회사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삐꾸요울루 파티를 준비했느냐,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 주느냐가 회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날은 또한 회사에서 일로만 엮여있던 동료들이 허물없이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핀란드인들은 원래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의 민족이긴 하지만, 이날은 정말 마음을 푹-놓고 술을 마신다. 평상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핀란드 사람들이 술의 힘으로 혀가 풀리고 말문이 터지는 날이기도 하다. 상사에게 말하기 어려웠던 불만도 술기운을 빌려 다 말할 수 있다. 맘속으로만 좋아했던 회사 직원이 있다면 술의 용기를 빌려 고백도 할 수 있다. 이런 사랑 고백은 삐꾸요울루 파티에서 의외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파티에 참석할 때 유난히 꽃단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날이 핀란드에서는 제 2의 '밸런타인데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히 다음 날, 술이 깬 후에 그 누구도 전날 밤 벌어진 낯 뜨거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삐꾸요울루의 철칙이다. 사람들은 태연히 다시 출근하고 일상생활을 이어 나간다.

코로나19로 사정은 조금 바뀌었지만 삐꾸요울루는 핀란드 요식업계의 가장 큰 대목이기도 하다. 유명 레스토랑은 이른 가을부터 좋은 자리가 다 만석으로 예약된다. 회사나 단체의 삐꾸요울루는 극장 같은 넓은 장소에서 열리기도 한다. 코로나19 전에는 핀란드에서 스웨덴까지 가는 크루즈 호도 인기 있는 파티 장소였는데, 1박 2일간 바다 위에서 신나는 여흥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삐꾸요울루 파티의 절정은 깜짝 게스트인 산타가 등장, 참석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순간이다. (사실은 참석한 사람이 각자 하나씩 임의로 준비한 선물을 산타가 대신 나눠준다.)

바쁜건 레스토랑만이 아니다. 경찰서도 덩달아 바빠진다. 과음으로 벌어진 사건 사고가 밤새도록 접수되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는 하룻밤 새 무려 400건이나 사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올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되며 많은 회사가 원격근무를 다시 시작했고 파티도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사람들이 삐꾸요울루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크리스마스 음식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햄과 훈제 연어, 절인 청어, 오븐에서 구운 뿌리채소 캐서롤, '쌀죽', 생강 쿠키, 별 모양의 크리스마스 타르트, 전통 크리스마스 음료인 글료기(glogi) 등이 주메뉴다.

글료기는 프랑스의 뱅쇼(Vin Chaud)와 비슷한 따뜻한 포도주로 핀란드뿐만 아니라 북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공통으로 마시는 음료다. 따뜻한 술은 차가운 술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한다. 술이 열을 만나면 기화되며 알코올 도수는 낮아지지만, 대신 품고 있던 좋은 향을 은은히 퍼트리기 때문이다. 뜨거운 술을 마시는 건 취하기보다는 후각과 미각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크리스마켓에서 판매되고 있는 핀란드판 뱅쇼 '글료기(glogi)'

만드는 방법은 먼저, 블랙커런트 주스와 물에 정향, 시나몬, 카르다몸 등 향신료를 넣고 끓이다. 다 끓여지면 체에 받친 후, 붉은 포도주를 넣고 한 번 더 살짝 가열한다. 아몬드와 건포도까지 넣으면 완벽한 글료기 한 잔이 탄생한다. 글료기는 손님이 도착했을 때 내어주는 '웰컴 음료'로 식전과 식후 음료로도 다 잘 어울린다. 이 음료는 원래 북유럽의 추운 겨울날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우체부의 몸을 따뜻하게 덥혀준 노동주(酒)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포도주를 넣지 않고 주스만을 이용한 무알코올 버전도 가능하다.

유리잔에 서빙되는 투명한 자줏빛의 글료기 한 잔은 잔을 감쌀 때의 따뜻한 촉감, 시나몬과 과일 향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짙은 향, 새콤, 달콤, 쌉싸름한 오묘한 맛까지…. 오감을 이용해 북유럽의 크리스마스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완벽한 음료다.

글료기

< 글료기 레시피>

재료:
블랙커런트 주스 (포도 주스, 블루베리 주스도 가능) 200 ml
물 500 ml
설탕 200 ml
시나몬 스틱(통계피) 1개
정향(clove) 8개
카르다몸 8개
붉은 포도주 750 ml (과일 향이 짙은 포도주가 적합)

만드는 법:
1. 주스, 물, 설탕과 향료를 5분간 끓인 후 체에 밭쳐 액만 받는다.
2. 포도주를 넣은 후 다시 가열한다. 김이 나기 시작하면 곧 불을 끄고 끓지 않도록 한다.
3. 몇 알의 아몬드와 건포도를 잔에 놓고 완성된 글료기를 붓는다. 아몬드와 건포도는 작은 그릇에 따로 서빙해도 좋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인-잇 #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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