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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북한, 높아지는 대북 피로도 - '쿨한 남북관계'론 ④

우리는 통일에 준비돼있는가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북한, 높아지는 대북 피로도 - '쿨한 남북관계'론 ④
지난 세 차례의 글들( ▶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햇볕정책은 왜 작동하지 않았나 - '쿨한 남북 관계'론 ①)에서 지난 20여 년간 햇볕정책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북한의 핵보유 의지는 확고해 보이는 만큼 북한 비핵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대북 접근법은 어떤 것일까요? '쿨한 남북관계'론의 마지막 글입니다.
 
'쿨한 남북관계'론 글 싣는 순서
① 햇볕정책은 왜 작동하지 않았나
②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을까
③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를 보였나
④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북한, 높아지는 대북 피로도
 

제재와 압박은 작동할까

앞선 글들에서 교류와 협력을 통한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고 북한 비핵화를 이룰 가능성이 낮다고 밝힌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진보-보수의 적대적 대립으로 인한 남한의 대북정책 비일관성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둘째, 김일성 일가의 세습독재체제에서 오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강제하고 북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북한의 존속을 핵심 이익으로 하는 중국의 후원을 받고 있고,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한다 하더라도 자력갱생으로라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못 먹고 못 사는 데 적응이 돼 있고 북한 정권의 주민 통제력만큼은 아직 확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외부의 제재와 압박이 가해진다 해서 북한 정권이 버티지 못할 정도의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 비핵화를 이루거나 북한 정권의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것도 과도한 '기대'에 불과합니다.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도, 제재와 압박을 통해서도 북한 비핵화를 이루기 어렵다면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북한 핵보유가 NPT 체제 위반이라는 점을 떠나, 북한의 핵보유는 우리 국익에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핵무기는 비대칭 무기이기 때문에 재래식 무기로는 대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든지 미국의 확장억제에 더욱 매달려야 하는데, 국제사회의 제재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쉽지 않고 미국의 확장억제에 매달릴수록 안보 종속은 더욱 심화됩니다.
 
안정식 취파용
 

유엔의 대북제재는 상수

이 지점에서 유엔의 대북제재는 상수가 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지만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유엔의 대북제재는 당분간 상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엔의 대북제재가 계속되면 우리가 국제사회의 경제 시스템에서 이탈할 생각을 하지 않는 한 남북경협의 진전도 어려워집니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정부가 남북경협에 매달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한계는 명확하며,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북한을 설득해 핵을 포기하도록 하겠다는 것도 과도한 '기대'에 불과합니다. 남한이 남북관계 진전에 목을 매면 맬수록 북한은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 남한을 이용할 뿐입니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 것은 남한을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북한은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해도 자신들이 손만 내밀면 남북관계에 매달리는 남한 정부가 언제든 다시 호응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북한은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남한이 언제든 연락사무소를 다시 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남한을 향해 '특등머저리' '저능하다'와 같은 막말을 수시로 내뱉다가 남북관계가 필요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는 것도 남한은 언제든 이용 가능한 존재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필요하면 언제나 남한의 각종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남한을 윽박지르고 달래며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대북 피로도만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북한에 호의 보이는 것만이 국익인가

북한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은 기분 나쁘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물론 우리는 다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핵보유국의 길을 꾸준히 향해가며 필요한만큼 남한을 이용하는 북한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는 것이 과연 국익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남북관계가 진전되어야 동북아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북한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남북이 소통하고 있으면 한반도 문제에 있어 미국과 중국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남북관계 진전이 가능했던 것은 북미 제네바합의(1994)와 9·19 공동성명(2005)으로 북한 비핵화가 합의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 핵문제가 국제적 합의로 봉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핵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진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핵 합의는 깨졌고 그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핵실험을 6번이나 했습니다. 미국까지 도달 가능한 ICBM 발사체도 개발했습니다. 북한의 핵보유 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유엔의 대북제재는 여러 겹으로 촘촘해졌습니다. 남북관계의 진전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된 것입니다.

북한에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진전됐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 내내 남북관계 개선에 모든 힘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달라졌습니까? 경협과 관련된 부분은 유엔 제재 때문에 어렵다고 하더라도 코로나19 방역 같은 보건분야 협력이나 인적교류 등에서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북한은 이마저도 남한에 냉랭합니다. 남북관계를 실질적인 협력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남한 정부가 남북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교류협력 하나하나도 정치적 활용가치를 계산하며 움직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인정하자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합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 남북관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임기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도 재개되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고"라는 문구까지 넣었음에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았고 유엔의 대북제재가 온존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당분간 쿨하게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핵보유 의지를 굽히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에는 한계가 불가피합니다. 북한의 핵보유 의지와 유엔의 대북제재를 상수로 인정하고, 그러한 선상에서 가능한 남북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 과도한 기대에 매몰돼 '북한이 언제 호응해올까' 하고 북한에 매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동포애적 견지에서 대북 협력과 지원의 가능성은 열어놓되, 북한이 남북관계에 호응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남한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판단하면, 북한도 비로소 실용적인 차원에서 남북 협력 여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남북관계 열의로만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를 모두 그만두자는 말이 아닙니다. 대북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정부 차원의 인도적 지원이나 민간단체의 교류 협력, 인적 교류 등은 상황에 따라 계속할 수 있습니다. 평창올림픽과 같은 이벤트를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고, 돼지열병이나 코로나19 같은 보건 분야에서 남북이 협력의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협력에 목을 매지 말고 북한이 원하면 할 수 있다는 쿨한 자세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남북관계에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봅니다. 남북관계에 열의를 다해왔다는 현 정부가 결과적으로 획기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뤘습니까?

북한의 핵개발과 유엔의 대북제재가 온존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열의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습니다.

남북관계에 공을 들인 문재인 정부에 대해 북한이 냉랭한 이유는 남한 정부가 실질적으로 해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한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 쪽에서 흘러나오는 얘기 중에는 "문재인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처럼 하더니 실질적으로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남북 간 철도 도로 연결 착공식도 (남한 정부가) 하자고 하자고 해서 해줬더니 그 이후 실질적으로 한 게 뭐가 있느냐"라며 북한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핵개발과는 별개로 문재인 정부가 대북 협력에 어느 정도 속도를 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막상 실질적으로 되는 것이 없자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측의 얘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는 없지만, 북한의 핵 개발과 유엔 제재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이라는 과도한 '기대'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쿨'한 남북관계

비핵화협상은 계속해야 합니다.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비핵화를 계속 요구하고, 북한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핵화와 관련된 일부 진전된 전술적 조치를 취한다면 우리도 그에 맞춰 국제사회와의 협의 하에 제재의 예외를 인정받아 일부 전향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행동 수준에 따라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의 재개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일부 전술적 변화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냉정한 판단 하에서 남북관계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기대와 의욕은 가상한 것이지만, 기대와 의욕이 현실보다 너무 앞서 있을 때 대북정책은 허공 속의 이상을 좇게 됩니다. 당분간 남북은 지금처럼 두 개의 체제로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붕괴를 추구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몰아가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지만, 핵을 가진 세습독재 체제인 북한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통일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과도한 열의에 빠져 남북관계에 매달리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이상과 남북관계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객관적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때로는 상황을 지켜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가능한 선에서의 관계를 추구하는 '쿨한 남북관계', 당장은 더디게 보일 수도 있지만, 국민들의 대북 피로도를 줄이고 냉온탕을 오가는 남북관계의 등락을 넘어 장기적으로 지금보다 안정적인 남북관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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