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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19살 자살폭탄 테러범, 학폭이 만든 비극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인-잇] 19살 자살폭탄 테러범, 학폭이 만든 비극
지난 6월 말 광주의 한 야산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고교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휴대전화에서 학교폭력 영상이 발견되면서 오랫동안 학폭에 시달린 피해자임이 세상에 드러났다.

비슷한 무렵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Festival d'Aix-en-Provence)에서는 핀란드의 한 창작 오페라가 초연돼 큰 호평을 받았다. '무죄(Innocence)'라는 제목의 이 오페라는 특이하게도 학교 총기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 오페라에서는 10년 전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과 범인인 남자 형제의 결혼식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총기 사건의 가해자, 총기 사건의 피해자가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인 것으로 밝혀지며 극적 반전이 벌어진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핀란드 고교 총기 사건은 허구이지만, 핀란드에서는 실제로 학교 총기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 2002년 우리 집 근처 쇼핑센터에서 일어났던 폭발 사건도 장소가 학교는 아니었지만 학교 집단 따돌림 피해자가 자살폭탄 사건의 가해자가 된 경우였다. 7명 이 숨지고, 중경상자만도 수백 명에 이른 큰 사고였다. 다행히 나는 그날 그곳에 가지 않아 사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저녁 뉴스를 통해 눈에 익숙한 쇼핑센터 내부가 폭탄으로 무너지고 검게 그을린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핀란드 언론은 처음엔 9.11 사건과 비슷하게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곧 사망자 명단에 포함돼 있던 19살 청소년이 저지른 일로 밝혀지며 핀란드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범행 동기에 대해선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로 잠정 결론이 났었지만 보다 확실한 동기는 한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2년 후, 숨진 청소년의 아버지가 쓴 『Poikani Petri Gerdt』(뜻: 내 아들 페트리 게르트)라는 책이 출간됐다. 그는 '너무 괴로워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아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라며 아들의 문제를 뿌리부터 차근차근히 풀어나갔다. (책에 의하면) 페트리는 어릴 때부터 계속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키가 유난히 컸던 페트리는 학교 농구단에서 농구 선수로 활약했지만, 휴식 시간조차 팀원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시 아들의 어려움을 속속들이 다 알지 못했고 큰 도움도 주지 못했다며 자신을 자책하며 용서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다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소외된 청소년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자원봉사자였다. 아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지만, 다른 청소년에게는 도움이 되고 싶어 자원봉사자가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페트리의 아버지는"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다시 열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핀란드에서는 2007년, 2008년 학교 총기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가해자는 모두 집단 따돌림 피해자였다. 당시 핀란드 교육은 피사(PISA) 테스트에서 (OECD 학업 성취도 비교 평가) 1위를 차지하며 대외적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다는 말처럼 핀란드 교육의 화려한 순위 뒤엔 크고 짙은 그늘이 있었다.

핀란드 한 지인은 자신이 어렸을 때도 반에는 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은 듯 보였다. 몇 년 전, 핀란드에서도 유명 정치인이 장관에 임명되자마자 그에게 어릴 때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람들이 속출해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 그 장관 후보자는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고,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평화롭게만 보이는 핀란드에서 집단 따돌림이 깊고 넓게 퍼진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일 민족 국가여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한 것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다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 이민자뿐만 아니라 같은 핀란드인이라도 자신과 조금 다르다고 판단되면 배척하는 성향이 굳어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학교 총기 사건을 여러차례 겪은 후, 2009년 핀란드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학교 집단 따돌림 근절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대학 전문 연구팀과 공동으로 '키바 코울루 Kiva Koulu'라는 집단 따돌림 방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핀란드 전국 학교에 보급하고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의 주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침묵하는 다수'가 집단 따돌림을 막는 주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반영웅(antihero)'적 주인공 엄석대의 권력을 키워준 것도 그 앞에서 끽소리조차 못내던 다수의 아이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침묵하는 다수가 피해 학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여 가해자에게 더이상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난 10여 년간, 다행히 핀란드 학교의 집단 따돌림 현상은 20% 이상 줄어들었다.

핀란드의 아동 심리학 전문가인 안드레 서랜더(Andre Sourander) 박사는 세계 최초로 어린 시절의 집단 따돌림 경험과 성인 정신장애와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밝혀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집단 따돌림을 오래 당한 아이들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성인이 되도 되돌리기 어려운 정신장애를 겪게 될 가능성이 크며, 이런 집단 따돌림의 심각한 장단기적 결과를 교육 정책입안자, 교직원, 일반 시민 모두 인지하고 사후 약방문보다 사전 예방과 조기 발견에 더 주력할 때라고 강조했다.

2019년 어릴 때 집단 따돌림을 받았던 한 젊은이가 그의 정신적 상처를 자전적 소설로 펴내 큰 주목을 받았다. 『Jalat Ilmassa 얄랏 일마싸』 (뜻: 공중에 떠 있는 다리)라는 제목의 이 책은 저자가 대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한 후, 그 원인을 찾으려 써 내려간 글이다. 그가 파고 들어간 두려움의 뿌리에는 유치원부터 시작된 오랜 집단 따돌림의 경험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가해자는 사라졌지만 대학생이 되서도 끔찍한 경험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집단 따돌림 경험보다 더 끔찍한 것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상처받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소설 마지막 장에 주인공은 용기를 내어 차가운 겨울 호수에 알몸으로 뛰어든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잠시 후 나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얘기하며 최대한 버틴다. 그 후 신기하게도 그의 몸은 조금씩 따뜻해지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학교 집단 따돌림 현상이 핀란드에서 수치상 줄어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학생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핀란드에서도 학교 폭력으로 중3 학생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올해 초, 핀란드 교육부 장관은 집단 따돌림 근절과 관련된 대대적인 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는 "모든 집단 따돌림 사건 뒤에는 고통받는 학생과 그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가 있다"며, 앞으로는 단 한 명의 소중한 아이도 희생되지 않도록 집단 따돌림 사건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선포했다. '무관용 원칙'은 학교 혼자서 나서서 실행하는 고군분투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나선 전면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모두의 참여를 촉구했다.

핀란드 교육을 대표하는 유명한 슬로건은, 이제는 집단 따돌림 문제에도 적용될 것 같다.

"No child left behind!"
(1명의 학생도 놓칠 수 없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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