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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내가 건넨 배려 한 조각, 누군가에겐 평생 행복입니다

[인-잇] 내가 건넨 배려 한 조각, 누군가에겐 평생 행복입니다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SBS 뉴스

작성 2021.07.17 11:01 수정 2021.07.17 13: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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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인-잇] 내가 건넨 배려 한 조각, 누군가에겐 평생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을 것이며, 당신이 한 일도 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는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People will forget what you said, people will forget what you did, but people will never forget how you made them feel.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

2000년대 초 연이어 태어난 세 명의 아이를 돌보던 젊은 엄마였던 나는 버스가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운전면허가 없기도 했거니와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 버스비가 무료여서 그 혜택을 최대한 이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가는 유모차에 눕히고, 둘째는 유모차에 달린 발판에 태우고 첫째가 걷기 힘들어하면 들쳐 업은 채 버스를 타고 내리던 슈퍼맘이었다.

하지만 핀란드어가 서툴러 익숙한 노선은 큰 문제 없었지만 낯선 곳에 가야 할 때는 버스를 잘못 타기 일쑤였다. 그날도 버스를 잘못 탄 것이 틀림없었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버스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기사에게 다가가 '떠듬떠듬' 왜 서지 않느냐 물으니, (대충 이해한 바로는) 지금 탄 버스는 공항 직행버스라 공항에서만 선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공항까지 한참을 가야 비로소 다른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말 그대로 비상사태였다. 배고프고 피곤해 칭얼거리는 세 아이를 보니 눈앞이 하얘졌다. 무작정 기사에게 "빨리 내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 때 갑자기 버스 뒤에 있던 핀란드 중년 여성이 기사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기사를 향해 "빨리 내려주라"며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세 아이와 나를 연달아보며 "이런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사정을 봐줘야 한다"고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목소리까지 높이는 것이 아닌가. 무심했던 기사도 그 아주머니에게는 못 이기겠다는 듯, 결국 다음 정거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버스에서 황급히 내린 뒤에야 그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못했다는 아쉬움이 뒤늦게 몰려왔다. 자기 일도 아닌데 남에게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도와주었던 그 아주머니의 적극적인 배려는 꽁꽁 언 무표정한 핀란드인 마음 속에 베어있는 따뜻한 정(情)을 느끼게 해준 계기였다.

개인이 아닌 핀란드 사회와 국가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첫째 아이가 돌을 갓 넘기고 처음으로 크게 아팠던 날, 초보 엄마였던 나는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치료가 끝난 뒤 간호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비를 나라에서 지급해주니까 영수증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급하게 병원에 와야 하는 경우 택시비를 나라에서 내준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웃 할머니에 대한 지원도 나를 놀라게 했다. 연금을 많이 받지 못해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은 이웃 할머니의 안경이 깨져 걱정했는데  (핀란드는 안경이 몇십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상당히 비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예전 구닥다리 안경보다 훨씬 세련되고 멋진 안경을 끼고 나타나셨다. 나라에서 안경을 해주었다는 거다. 그해 겨울엔 할머니 집 유리창이 깨져 차가운 겨울바람이 실내까지 들이닥쳤을 때도 나라에서 유리창을 통째로 갈아주었다. 내가 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역 사회 차원에서 주민들에게 베푸는 혜택도 많다.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료 대여 우산'이다. 우산을 잊고 지참하지 못한 사람들은 시내 곳곳에 설치된 무료 대여 우산 통에서 우산을 가져가 사용한 뒤 다시 꽂아두기만 하면 된다. 최근 한국의 TV방송에서도 내 어깨는 흠뻑 젖지만 옆 사람을 위해 우산을 기울이며 '마음을 기울인다'고 속삭이는 한 은행의 광고를 본 적 있는데, 한국도 핀란드도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역 사회의 이 같은 배려 덕분에 사람들은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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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핀란드 신문에서 특별한 미담 기사 하나를 읽었다. 지난 6월 한 남성이 집안에서 몇 대 째 내려온 귀중한 반지를 호수에 빠트려 잃어버렸다. 반지 주인은 SNS에 이 상황을 알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한 젊은 남성이 호수에 직접 들어가 반지를 찾아보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수색 첫날 그는 잠수 도구를 갖추고 호수로 뛰어들어 바닥에 얼굴을 묻고 흙을 채취하고 솎아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나 물속 시야가 20~30cm 밖에 되지 않고 호수 바닥은 너무 넓어 찾기를 실패했다. 첫날 수색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자 반지 주인은 반지 찾기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의 휴대전화에 놀라운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반지를 잠수부가 손에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주인은 너무 놀라고 기쁜 마음에 마시고 있던 모닝 커피에 사래가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주인이 비록 희망을 포기했을 지라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 남성은 그 손길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수색이 실패한 다음 날 새벽부터 다시 호수로 가서 끈질기게 반지를 찾기 시작했고, 그 정성이 통했는지 기적처럼 반지가 발견된 것이다. 주인은 고마운 마음에 사례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젊은 남성은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반지를 찾은 남성은 기자에게 "이번 일을 겪고 핀란드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는 인상적인 소감을 전했다. 그의 이런 믿음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을 것 같다.

기적처럼 돌아온 반지. (사진=Timo Martikainen)
코로나 19처럼 나쁜 병균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향해 베푸는 작은 한 방울의 배려와 친절도 잔물결을 이뤄 생각보다 멀리 그리고 깊게 전파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첫 한 방울을 남이 시작할 때까지 꼭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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