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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존댓말' 판결문이 나온 진짜 취재 뒷얘기

[취재파일] '존댓말' 판결문이 나온 진짜 취재 뒷얘기

한 고법판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①

조기호 기자 cjkh@sbs.co.kr

작성 2020.05.07 17:04 수정 2020.05.08 17:5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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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존댓말 판결문이 나온 진짜 취재 뒷얘기
지난 2008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부지방법원을 출입하던 기자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법원을 들러 언론과의 소통 창구였던 공보 판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판사님 책상 옆에 종이 뭉치가 꽤 쌓여 있었습니다. "이게 뭐죠?" 무심코 물었습니다. "아, 그거 국립국어원에 보낼 판결문 후보들입니다."

판결문을 왜 그곳에 보낸다는 건지 다시 궁금해졌습니다. "판결문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서 좀 쉽게 바꿀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보내기로 한 거예요." 순간 '이건 기사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동안 법률더미에 묻혀 살고 있는 판사들에게는 판결문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한글인데, 한글 같지 않은 게 바로 판결문이었죠.

그걸 법원 스스로 깨닫고 '외래 수술실'로 보낸다니 놀랄 수밖에요. 물론 지금도 어렵긴 하지만 10여 년 전보다는 많이 선명해진 요즘의 판결문은 당시 남부지법이 보여준 용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보도를 마치고 며칠 지나 그 공보 판사와 저녁 자리를 가졌습니다. "아니, 어쩌자고 그런 참신한 생각을 하셨어요?" 판사님의 대답은 대충 이랬습니다. "기자들도 가끔 헛갈려서 판결문 기사를 오보 내고 그러더라고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 정도로 판결문이 어렵다는 얘기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 저도 판결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나 다시 읽을 때가 많았거든요.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반말 판결문대화를 이어가다가 저도 발칙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아 그런데, 왜 판결문은 다 반말이에요? 국민이 만만한가?ㅋ" 순간 판사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던 걸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대답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더 경륜이 쌓이면 존댓말로 판결문을 쓸 겁니다."

도원결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고사성어입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나온 말이지요. 뜻이 맞는 사람끼리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약속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때 판사님과 맺은 도원결의는 이랬습니다. '판사님은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을 때 존댓말 판결문을 작성하시고, 저는 그 소식을 제일 먼저 타전하는 기자가 되겠다'

그 뒤로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공보 판사님은 강산이 한 번 변한 뒤에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쯤이었을 겁니다. "판사님, 존댓말 판결문은 도대체 언제쯤 쓰실 건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판사님은 "어, 사실 1월부터 조금씩 쓰고 있었어요." 마음은 왜 진작 말씀을 안 하셨느냐고 따지고 있는데 말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와...대박."
이인석 판사그 공보 판사님은 현재 대전고등법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인석 고법 판사님입니다. 도원결의라는 채무(?) 각서를 흔들며 기사화 하겠다고 했을 때 판사님은 저를 진정시켰습니다. "아직은 모니터링을 더 해봐야 해요. 시작하고 한 1년은 지나야 장·단점이 분명해지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그렇게 약속의 1년을 훌쩍 넘긴 지난 4월, 다시 이 판사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의 우여곡절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지만, 6일 보도한 <존댓말로 쓴 판결문...70년 전통 깬 판사> 뉴스는 이렇게 출생 신고를 마쳤답니다.

인터넷 댓글을 살펴보니, '권위를 스스로 벗어던진 모범', '이런 착한 변화가 사법부의 변혁을 이끌 듯' 등 칭찬이 많았습니다. 반면 '형식이 아니라 공정한 판결이 우선', '아무리 그래도 판결인데 존댓말은 좀 아닌 것 같다' 등의 의견도 있었죠. 이런 다양한 견해들을 참고해서 다음 편에서는 '존댓말' 판결문이 왜 의미가 있는지, 보완할 점은 없는지 등에 대해 다서 ssul을 풀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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