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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존댓말'로 작성된 판결문…70년 전통 깬 판사

[단독] '존댓말'로 작성된 판결문…70년 전통 깬 판사

조기호, 손형안 기자 cjkh@sbs.co.kr

작성 2020.05.06 21:21 수정 2020.05.06 22:2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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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 보시는 것은 수사기관의 출석 요구서입니다. 내용에 따라서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낄 수 있는 공문서지만, 형식은 모두 존댓말로 되어 있습니다. 과태료나 벌금 납부서, 군 입영 통지서도 존댓말로 쓰여 있는 것이 자연스럽죠. 하지만 유독 법원 판결문은 '~하라', '~한다' 같은 식으로 쓰이는데, 이런 딱딱한 판결문을 처음으로 존댓말로 작성한 사례가 나왔습니다.

조기호, 손형안 기자의 단독 보도입니다.

<기자>

지난해, 1년이 넘는 소송에서 이긴 양진석 씨, 하지만 판결문을 읽으면서 명령이나 지시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양진석/재독 교포 기업인 : 우리가 이겼다 하더라도 칼로 자르듯이 ~한다, ~한다… 이런 게 꼭 군대 있을 때 상사들이 얘기하듯이 그런 느낌을 갖죠.]

또 다른 소송 당사자, 김 모 씨의 경험도 비슷합니다.

[김 모 씨/소송 당사자 : 그냥 (판결문) 봉투만 봐도 그냥 막 떨려요. 그걸 열었을 때 막 반말로 돼 있으면 내가 죄인 취급 받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우리나라 헌법이 제정된 1948년 7월 17일 이래로 법원은 모든 판결문을 다 반말체로 작성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오래된, 견고한 흐름을 깬 이른바 '존댓말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지난달 23일 대전고등법원 민사 판결문입니다. 반말 판결문 출석요구서, 판결문 존댓말로지금까지는 주문, 판결 이유 등이 모두 반말이었는데, 이 판결문은 모든 문장이 존댓말입니다.

또 다른 가처분 소송 결정문이나, 형사 사건 결정문 역시 모든 문장이 존댓말로 돼 있습니다.

7년 전 사법부가 유신 체제의 잘못을 사과하며 판결문의 한 문장을 존댓말로 쓴 적은 있지만, 판결문 전체를 존댓말로 쓴 것은 처음입니다.

이 판결문을 쓴 판사는 최근 1년 단계적으로 존댓말을 늘려왔습니다.

[이인석/대전고등법원 고법 판사 :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꾸는 게 처음에는 저도 굉장히 어려웠어요. 판결문 주문은 강제 집행이거든요. 국가 권력이 강제 집행하기 때문에 여기에 의문이 있으면 안 되고 명확해야 하거든요.]

아직 판사 한 명이 시작한 움직임인 데다가 법조계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사법부가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인석/대전고등법원 고법 판사 : 판결문을 받아보는 분은 국민이고,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나라의 주인한테 판결문을 보내는데 존댓말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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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결문 대부분 이렇습니다.

"벌금을 지급하라", "서류를 열람하게 하라."

이런 표현이 존댓말 판결문에서는 "벌금을 지급하십시오", "서류를 열람하게 하십시오"로 바뀝니다.

이 작은 변화가 만들어지기까지 70년이 걸렸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존댓말로 판결문을 작성하면 법원의 권위가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임지봉/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국민이 덜 고압적으로 느끼고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표현 방식을 쓰는 것이야말로, 보다 더 법원이 국민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판결문을 존댓말로 쓸 경우, 판결문이 길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작성해보면 분량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인석/대전고등법원 고법판사 : 하나는 존댓말로 써보고 하나는 기존대로 반말로 써봤어요. 그런데 글자 수는 늘어났는데 페이지 수는 똑같이 23페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분량이 많이 늘어나지 않는구나.]

재판의 결과를 얼마나 잘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존댓말이 낫다는 의견입니다.

[허 윤/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 : 분쟁이란 것은 원고와 피고가 결국 판결에 승복을 해야 하거든요. 존댓말 판결문은 아무래도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좀 더 판결에 쉽게 승복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존댓말 판결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법원 판결문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다양한 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영상취재 : 배문산, 영상편집 : 이재성·박선수, CG : 이유진·김규연·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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