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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내 딸아, 외롭고 슬퍼도 굳세게 자라다오

파파제스 |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예쁜 딸을 키우는 아빠, 육아 유튜버

최근 두 달간 나는 <빨간 머리 앤>에 빠져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밤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빨간 머리 앤>을 보면서 울고 웃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시즌1부터 시즌3까지 총 30편을 보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설책까지 사서 읽었다.

사실 넷플릭스를 보기 전까지 나는 '빨간 머리 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만화 주제가의 첫 소절만 흥얼거릴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 내용도 인물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만화 주인공 '빨간 머리 앤'이 2020년 내 눈 앞에서 살아서 돌아와 성인이 된 나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추억의 빨강머리 앤, 다시 푹 빠져버렸다.

어떻게 보면 빨간 머리 앤의 스토리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고아였던 앤이 커스버트 남매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초록 지붕에서 사는 이야기. 스릴러 같은 긴장감과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처럼 화려한 그래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캐나다의 동쪽 끝 작은 마을인 캐번디쉬에 사는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왜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을까?

그것은 '앤'이라는 캐릭터가
나보다 더 당당하고 자유롭기 때문인 것 같다.


앤은 커스버트 네로 처음 입양되어 온 날부터 동네를 주름잡는 레이첼 부인에게 마르고 못생긴 주근깨 소녀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버럭 화를 낸다. 동네에서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당발 레이첼 부인을 한 방 먹인 것은 앤이 등장하기 전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선 자신을 놀리는 남학생인 길버트의 머리를 서판으로 가격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성격대로 하고야 마는 인물이다.

또 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수다스러운 걸 빼놓을 수 없다. 해야 할 말뿐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다 한다.

 
자기가 지금 왜. 행복한지
왜. 눈물이 나는지
왜. 화가 나는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각종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설명해낸다.

이처럼 앤은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 부여해오던 소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나긋나긋하고 순종적인 그간의 소녀 캐릭터들과는 달리 괴팍스럽다거나 버릇없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의 등장에 당황하지만 결국엔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버릇없게 군다며 앤을 싫어했던 마당발 레이첼 부인도 앤과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앤에게 머리를 가격 당한 남학생 길버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빨강머리 앤 (사진=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애니메이션)
앤의 석판에 맞은 길버트. 앤에게 제대로 반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라는데...

이런 앤에게 나도 빠지게 된 결정적인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앤이 말을 타는 장면이었다. 코르셋과 치마를 던져 버리고 승마 바지에 머리를 흩날리며 말을 타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가슴이 '탁' 터지는 듯한 해방감을 들게 했다. 앤의 말(言)을 듣고 또 앤이 말(馬)을 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왜 감동을 받고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을까?

아마 나는 앤처럼 당당했던 적도,
자유로웠던 적도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학생 때의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 적기 바빴지 내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거나 질문을 해 본 경험이 없다. 현실에서는 영화 속의 스테이시 선생님과 같이 열린 마음의 선생님보다 필립스 선생님처럼 꽉 막힌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학교에선 선생님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았고 대학과 군대에서는 선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정해진 업무 틀 속에서 일을 해야 했고 내 의견을 말하면 그것은 곧 내 업무가 되었다. 튀지 않으려 입은 꾹 다물고 윗사람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엉덩이는 무거워야 했다. 어느덧 나는 당당함과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다. 아빠의 입장에서 <빨간 머리 앤>을 다시 보니 '앤이 어떻게 저렇게 앤답게 자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앤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준 커스버트 가족들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딸을 어디서나 자유롭게 말하고 누구 앞에서나 당당한 앤처럼 키울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자랄 한국 사회는 그런 당당함과 자유로움이 용인되는 사회일까? 나조차도 세 살짜리 딸에게 '그거 하면 안 돼', '하지 마'라고 점점 자주 말하게 되는 것을 보면 결코 쉬운 일 같지는 않다. 자유롭고 당당하기보다는 순응하고 예의 바르기를 기대하는 이 사회에서 앤과 같은 어린이가 자라나서 앤과 같은 어른이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빨강머리 앤 (사진=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애니메이션)

아빠가 된 이후 <빨간 머리 앤>을 다시 보고 마음먹은 것이 하나 있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함께 말을 타고 자유롭게 달려보는 것이다. 딸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며 자신이 가고 싶은 대로 마음껏 뛰놀게 하고 싶다. 내 딸만큼은 사회가 규정하는 코르셋에 맞추지 않고 자연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릴 때 흥얼거렸던 만화 <빨간 머리 앤>의 주제곡을 다시 한번 흥얼거려 본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 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딸아, 때론 외롭고 슬프더라도 굳세게 자라 다오!
 
#인-잇 #인잇 #파파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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