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법원의 개인 정보 유출…바뀐 건 없었다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작성 2019.02.05 10:0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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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보상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형사보상법은 '형사소송 절차에서 무죄재판 등을 받은 자에 대한 형사보상 및 명예회복을 위한 방법과 절차 등을 규정함으로써 무죄재판 등을 받은 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실질적 명예회복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이 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받은 사람이 검경의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구금이 됐거나 변호사 비용이 들었을 때 국가가 공권력을 잘못 사용한 것이니 이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해 준다는 게 '형사 보상 제도'의 취지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에 당사자가 피해를 입은 것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국가가 금전적으로나마 당사자에게 공식 사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무분별하게 유출된 개인 정보…그 후

그런데 당사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의 사과가 비수가 되어 다시 당사자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형사 보상 결정문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관보에 그대로 게재되고 있는 겁니다.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로 수사 기관의 조사와 수차례 재판을 받은 끝에 무죄를 받고 형사 보상을 받았는데, 관보에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 집 주소, 직업까지 함께 관보에 게재되고 있는 겁니다. 이 정도 정보라면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려 해도 빼박입니다.

SBS는 지난해 10월 14일, 개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마련된 제도가 2차 피해를 가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10월 기준, 지난해 형사 보상 결정문을 관보에 게재한 법원은 38곳이었는데, 이 중 동·호수 등 상세 집주소를 게재하지 않은 곳은 1곳뿐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모든 법원은 당사자의 실명과 생년월일과 결정 내용을 기재하고 있고, 1곳을 제외한 나머지 법원들은 상세 집주소와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 직업까지 노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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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보도 이후 바뀐 대법원 지침

대법원은 SBS 보도 이후 내부 지침을 개정했습니다. '판결 공시절차에 관한 지침'으로 지난해 10월 25일 개정돼 그날부터 시행이 됐습니다. 개정된 지침을 형사보상 결정문을 관보에 게재할 때, 당사자의 구체적 집주소와 등록 기준지, 직업, 상세한 결정 내용을 삭제하고 관보에 게재하라는 내용입니다.
대법원 형사 보상 결정문 게재 개정 지침이 지침만으로도 문제는 있습니다. 죄명은 그대로 노출하도록 했고, 당사자의 실명과 생년월일은 역시 기존처럼 기재하도록 한 겁니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만, 혐의를 노출할 필요가 있는지, 당사자가 원치 않는대도 실명과 생년월일을 노출할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생년월일 삭제는 물론이고, 당사자 이름도 비실명화 게재하는 헌법재판소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헌법재판소-법원 관보 게재 비교혹시 당사자가 결정 사실을 모를 수도 있으니 관보를 보고 인지하게끔 하기 위한 차원이지 않을까? 형사 보상은 당사자의 신청이 있어야만 법원이 판단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청을 할 때 본인 혹은 변호인의 연락처를 기재하죠. 보상 결정이 났는데 당사자가 찾아가지 않는다면, 전화로 알려주면 그만입니다. 보상 결정을 관보에 게재해야 하는 현행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당사자 실명과 생년월일까지 굳이 명시해서 게재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 지침 개정 그 후…"홍보가 부족해서"

그래도 바뀐 대법원의 지침은 이전과 비교해 진일보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바뀐 대법원의 지침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SBS는 지침 개정 이후 형사 보상 결정문 게재 실태를 전수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습니다. 여전히 상당수 법원이 죄명과 실명, 생년월일은 물론이고, 상세 집 주소까지 그대로 관보에 노출하고 있었습니다. 바뀐 지침은 구체적 결정 내용을 삭제하고 게재하라는 것이었지만, 형사 보상을 받은 사람이 언제 체포되고 구속됐는지, 재판 진행 경과는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게재한 곳도 상당수였습니다.
형사보상 결정문 관보 게재 실태형사보상 결정문 관보 게재 실태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관보를 게재한 법원에 물었습니다. "법원행정처에서 바뀐 지침에 대한 홍보나 전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담당자가 기존 규정대로 처리를 해서 발생한 일이다", "담당자가 바뀐 규정을 제대로 숙지를 못 해서 기존대로 처리를 하다 보니 잘못 게재가 됐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기껏 지침까지 개정을 했지만, 홍보가 부족해서 개정된 지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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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도 법안 발의…하지만

사법부는 여전히 판결문 공개에 소극적입니다. 주된 이유는 판결문이 그대로 공개될 경우 재판 당사자의 개인정보 유출, 그리고 그로 인한 2차 피해 우려입니다. 수긍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형사 보상 결정문에 대해서는 이 원칙과 이유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고 결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개인정보 보호와 2차 피해 방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관보에 게재된 결정문은 수정되기도 어렵습니다. 관보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이미 게재된 관보는 현재로선 수정해 다시 게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침 개정 이후에도 개인 정보 유출이 계속되고 있는 탓인지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1명이 발의했는데, 형사 보상 결정문을 관보에 게재할 때 개인정보를 최대한 삭제해 당사자가 특정되지 않게끔 법원에 강제하는 내용을 새롭게 담은 겁니다.

국회의 법안 발의, 환영할 일입니다. 법원 자체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으로라도 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은 최소한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스스로 개정하고 교정할 수 있다면 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법원에 아쉬운 대목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대법원이 바뀐 지침이 각급 법원에서 잘 실행되고 있는지 점검해 봤다면, 바뀐 지침에 미비점은 없는지 살펴봤더라면, 굳이 법이 없더라도 충분히 현재와 같이 개인 정보가 무분별하게 유출되고 있는 현실은 바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법농단 사태로 '사법행정권'이라는 말 자체가 적폐로 몰리고 있는 실정이지만, 모든 사법행정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남용이 문제 될 뿐이지 정당한 사법행정권은 행사되어야 합니다.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에서 무죄를 받은 사람의 개인 정보가 지침 개정 이후에도 무분별하게 유출되고 잇는 현실. 사법 행정권은 이런 곳에 발휘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