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에게 그깟 노벨상이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 인정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생리학(의학)이니 물리학이니 화학이니 하는 노벨상의 시상 분야가 매일의 일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를 연구하거나, 적어도 대학 수준에서 공부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수상자의 이름을 들어도 '아, 그 사람!' 하는 반응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냥 휴대전화 화면에 뜨는 속보 한 줄, 읽고 무심하게 지워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노벨상에 대한 글이니까, 일단 올해의 발표 일정 정도는 한 번 체크해 보자.
노벨상 가운데,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나마 평화상과 문학상 정도가 아닐까. 살얼음판 위를 걷듯 아슬아슬했던 평화가 서서히 깨지는 것 같은 요즘의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노벨 평화상이 누구에게, 혹은 어떤 단체에게 수여되는지는 인류가 지켜야 할 '평화를 위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의미가 있다. 지난해에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필리핀(마리아 레사)과 러시아(드미트리 무라토프)의 언론인이 공동 수상했다. 문학상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영국에 정착한 압둘라자크 구르나(Abdulrazak Gurnah)에게 돌아갔다. 노벨 위원회는 수상 이유로 "문화와 대륙 사이의 간극에서 식민주의와 난민으로서의 운명이 끼친 영향을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관통해 낸 공로"를 들었다. 구르나의 주요 작품으로는 [낙원 Paradise]이 있고 지난 5월에 번역본이 나오기는 했지만, 기자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지난해 유명 문학상은 '아프리카 열풍'
세계 문학계에서도 오랜 시간 변방 취급을 받았던 아프리카 문학,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이 주목받는 최근 트렌드에 대해 큰 불만은 없지만, 그들이 상을 받으며 주목을 끌고 나야 대표작을 중심으로 '선택'되어 번역본이 출간되는 국내 출판업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조금 씁쓸한 입맛이 가시지 않는 것도 사실. 내가 아는 작가가, 내가 아는 작품으로 상을 받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마음, 욕심이긴 해도 오랜 문학 애호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도박사들의 예측은?
배당률이 조금씩 변해 수상자 발표 때까지 어느 정도의 변동은 계속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작가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 꼽힌다. 바로 아래 케냐의 소설가 응구기 와 티옹오는 표기 문제로 중복 베팅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 다음으로 얼마 전 무슬림 청년에게 흉기 테러를 당한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가 나온다. 흉기 피습 사건이 상당히 최근인데다가, 이런 흉악한 테러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루슈디가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일종의 '수상 운동'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는 리스트에서는 여덟 번째, 공동 배당률의 후보를 감안한 순위로는 7위 정도다.
하루키, 수상권에서 멀어졌다?
Q. 작가 하루키의 매력, 그리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비결은?
A. 약간은 멋을 낸 듯한 문체도 산뜻하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나 등장인물의 갈등도 적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훑을 수 있다. 또 주인공이 평범하고 '쿨'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특징은 하루키의 작품에는 다양한 '꺼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눈, 코, 귀, 입 요깃거리들이 즐비하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가득해 독자들이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스토리가 좀 늘어진다 싶으면 (비장의 무기인) 성(性) 묘사가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책장을 덮으려는 독자들을 다시 불러세우곤 한다. 1995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에는 종교도 한몫을 하는데 그것도 성과 결합된 파격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탓에 오락 소설이니, 포르노 소설이니 비판을 받곤 하지만, 전 세계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꽤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Q. 하루키, 지난 10여 년 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긴 했을까?
A. 2006년부터 매년은 아니어도 몇 번인가는 후보에 올랐을 거라 생각한다. 노벨 문학상 선정 기준이 '이상주의적 경향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상주의적 경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상 여부가 결정되겠지. 하루키의 수상을 여전히 조심스럽게 점치는 이유는 적어도 하루키의 작품이-작품성은 차치하고라도-전 세계 독자들을 아우르는 힘을 가졌고, 더구나 2010년 이후에는 특히 인류애와 휴머니즘,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언설로도 작품으로도 주제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루키가 (일본의)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표면화시키는 것은 일본 작가로서는 꽤 소신있는 행동이고, 미래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생기는 힘이라는 걸 그가 꾸준히 상기시키고 있기도 하다.
Q. 올해 수상 가능성은? 시기를 놓쳤다면 가장 아쉬웠던 해는?
A. 희박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있다. 다만 최대 걸림돌이 하루키가 '베스트셀러' 작가, 즉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라는 점이다. 하루키 본인도 올해 역시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면 아쉽기는 하겠지만 큰 낙담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하루키가 (수상으로) 돈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작가들도 많을 것이다.
가장 유력했던 해는 역시 프란츠 카프카 상을 수상했던 2006년, 그 다음은 모옌이 수상했던 2012년 전후, 그리고 2019년이 아닐까. 2012년에는 2010년에 발표한 [1Q84]에 대한 평가도 있었지만, 당시 유력 후보 1위였을 만큼 그의 작품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고, 2019년에는 (노벨상이 일본에) 25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속설 때문에 막연하게 기대를 한 부분도 있다. 다만 2017년에 발표한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에는 점점 노벨상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Q. 그래도 수상한다면 수상 소감은 어떤 내용일까?
A. 2000년대 이후 하루키의 수상 소감은 대부분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에 따른 핵무기 사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을 받은 기쁨은 아마 최소한으로 표현하겠지. 1982년 11월에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노마(野間)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처럼 "상은 작품이 받는 것"이라며 극도로 감정 표현을 절제하거나, 형식적인 감사에 그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장거리 주자' 체질인 하루키가 이번 수상을 통해 풀코스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을 때처럼 기쁨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하루키
2016년 미국의 뮤지션 밥 딜런이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 하루키는 SNS에 본인의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 영문판에 나온 대사를 인용해 "동정은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게 '보인다'인 이유는 본인이 직접 어딘가의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게 아닌 데다, 해당 SNS도 하루키와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직접 작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도 당시 SBS 취재파일로 이 내용을 보도한 적이 있다.
([취재파일] 하루키 "동정은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야" 바로가기)
그러나 역시 하루키도 사람인지라 몇 년째 유력 후보로 거론만 되고 수상자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을 터. 그래서인지 2년 뒤인 2018년 [기사단장 죽이기]의 영문판 출간에 즈음해 미국 뉴욕에서 마련된 한 이벤트에서는 직접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이미 낸 세금과 전 여친에 대해서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노벨 문학상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보면, '(노벨상을) 주든 말든 관심 없습니다'를 위트있게 돌려 말한 것이라는 해석에도 일리는 있다. 당시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영문판을 야심차게(?) 발표한 직후라 노벨 문학상 불발에 대한 소회를 '옛다' 하며 준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한편으로 굳이 그 자리에서 꺼내지 않아도 될 '노벨 문학상'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언급했다는 건 하루키가 본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세간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게 매년 무위로 돌아갔을 때 쏟아지는 사람들의 동정(또는 연민)이 얼마나 되는지를 꽤나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혀진다. 상이란, 특히 노벨상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지역 안배' 이론, 이번에는 혹시?
받거나, 혹은 못 받거나
기자는 물론 '성장하려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가 장강명의 저 말에 충분히 동의한다. 여기까지 꾹 참고 글을 읽어 내려오신 독자는 하루키에 대해, 그의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여부에 대해 상당한 관심(거기에 더해 '호감')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니클라스 엘메헤드(Niklas Elmehed)라는 스웨덴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 2012년부터 노벨 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매년 수상자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작가다. 노벨 위원회가 수상자의 사진 대신 초상화를 보여주는 건 사진에 걸린 저작권 때문. 아무튼 엘메헤드는 노벨 위원회 핵심 관계자 말고는 그 해 수상자의 얼굴과 이름을 남들보다 먼저 아는 극소수의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의 홈페이지(niklaselmehed.com)를 방문하면 그가 검은색 아크릴 물감과 얇은 금박을 이용해 수상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만약에, 하루키가 올해 노벨 문학상을 탄다면 하루키의 얼굴도 니클라스 엘메헤드가 그리게 될 것이다.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지만, 역시 하루키의 얼굴은 하루키와 오랜 시간 함께 작업을 해 온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安西水丸, 1942~2014)가 제일 잘 그리지 않았을까? 혹시, 노벨상 수상자로 하루키를 소개하는 그 자리에서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짙은 눈썹과 단춧구멍 같은 눈을 한 하루키를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안 그래도 지금쯤 수상자들을 그리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쁠 니클라스 엘메헤드도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마무리로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하루키의 얼굴을 보여드릴 예정이었지만, 저작권 상황을 알아보니 안자이 미즈마루가 생전에 그린 '하루키 얼굴'의 경우 작가가 고인이 되어 유족으로부터 사용에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국내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 씨가 그린 하루키의 얼굴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우일 씨가 그린 하루키 얼굴은 하루키 본인도 사용을 허가했다고. 안자이의 그림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한 느낌이다. 2017년 국내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리커버판 표지에 실렸다.
(구성·편집: 유성재 기자 /콘텐츠디자인: 옥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