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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하루키 "동정은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야"

[취재파일] 하루키 "동정은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야"
지난해 제가 속해 있던 부서 이름에 '문화'가 들어가 있다는 핑계(?)로 제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취재파일로도 몇 번 독자분들께 인사드렸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인연이 움직였는지 저는 지금 5개월째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작하셨겠지만, 이번 취재파일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13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습니다. 미국의 음악가 밥 딜런이었죠. 앞서 이곳 일본에서는 벌써 10년 째 수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온 무라카미 하루키가 과연 이번에는 노벨상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많은 예상과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방송에서는 하루키 팬들(일본에서는 '하루키스트'라고 합니다)이 모여 수상을 기원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이 실망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전파를 타기도 했는데요, 사실 이런 분위기는 이제 마치 '연례 행사' 같은 것이어서 일본인들도 작은 '축제'처럼 무겁지 않게 즐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쩌면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도쿄공업대 명예교수가 이미 결정되면서 '일본인 수상자'를 확보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노벨상 수상을, 수상자 개인의 인류에 대한 공로와 기여보다는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의 '성과'로 보는 시각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에는 그런 시각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죠. 아무튼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TV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한 영화평론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느냐 마느냐를 큰 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매년 이렇게 사람들이 노벨상을 놓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키가 받았다면야 물론 좋았겠지만, 밥 딜런도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랄까요.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6년 반 동안 미국의 군정을 경험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끈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일본에서는 GHQ로 통칭)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그야말로 '대량 주입'된 서구 문화에 상당히 익숙해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이런 일본인들에게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 역시 꽤나 반길 만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루키스트'들을 취재하던 일본 언론들은 하루키의 수상이 불발로 돌아가자 재빠르게 도쿄 시내의 '미국 포크송 동호회'나 팬카페 등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수상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음악 애호가들이 밥 딜런의 수상을 축하하는 모습을 늦은 밤부터 뉴스에 방영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일본 언론들은 밥 딜런이 지난 4월의 콘서트를 포함해 그동안 백 차례가 넘게 일본에서 공연을 했다며 자신들의 문화적 토양을 '살짝'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밥 딜런의 이번 노벨상 수상에 대해 그동안 늘 '수상 가능성이 더 높은 경쟁 상대'로 여겨져 왔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식 홈페이지(www.harukimurakami.com)가 소개하는 하루키의 SNS 계정은 페이스북과 핀터레스트입니다. 하루키는 14일 자정쯤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팬들에게 보내는 것 같은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그것도 자신의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을 인용해 남겼습니다. "자신을 동정하지마. 그건 질이 좋지 않은 놈들이나 하는 일이야."
 
하루키 페이스북
오늘 일부 국내 언론에 하루키가 '트위터'를 통해 메시지를 남겼다면서 기사화되었습니다만, 트위터 한국지사를 통해 트위터 일본지사에 확인한 결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식 트위터 계정은 없습니다. 하루키를 비롯한 세계적인 유명인의 계정은 국내에도 팬이 만든 일종의 '가짜 계정', 혹은 '오마쥬 계정'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루키의 수필이나 기고문의 문장을 서버에 등록해 둔 뒤 이를 일정 시간 간격으로 자동으로 게재하는 이른바 '봇bot' 계정이 몇 개 있습니다. 일부 기사들이 이 트윗을 하루키의 반응으로 인용해 보도했지만, 기사에 인용된 트윗들이 유명 문학상에 대해 하루키가 '언젠가' 한 말이기는 할지라도 이번 2016년 노벨문학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메시지는 아닙니다. (한 기사는 '하루키의 트위터 계정 팔로워가 34만 명을 넘는다'고 했지만, 이 기사가 인용한 계정 역시 팬의 '오마주 계정'으로 보입니다. 트위터에서, 하루키 같은 유명인의 팔로워가 34만 명이면 지나치게 적은 숫자가 아닌가요.)
 
하루키 트위터 봇계정
하루키 트위터 봇계정
지난해 하루키는 출판사 '신조'와 함께 전세계 독자들의 질문에 하루키가 직접 답하는 이벤트를 열고, 그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에도 짖궂은(?) 독자들은 하루키에게 노벨상 수상이 매년 불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하루키는 상당히 '쿨'한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요약하면 '(권위 있는) 문학상도 좋지만, 수상 자체에 연연하지는 않는다'는 자세로 표현하면 될까요. 대신 하루키는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지금 시대에 대한, 지금 시대를 불안하게 하는 전쟁이나 방사능 폐해, 대규모 재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실히 표명해 왔습니다. 2009년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에 대한 반대 견해를 당당히 밝힌 것과, 2011년 카탈루냐 국제상 수상 소감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피폭과 관련한 일본의 과거를 비판한 것이 분명한 사례입니다. 만약 하루키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수상 그 자체에 대한 소감보다는 시상식에서 밝힐 메시지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추측입니다만, 하루키는 이번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하루키가 밥 딜런 등 이른바 미국의 '비트 세대' 예술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루키 본인이 서구의 이른바 '68년 세대', 그리고 일본의 '전공투' 세대 끄트머리에서 감수성 예민한 20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루키는 올해 6월 일본의 월간 문예지 '신조'에 미국의 비트 세대 시인인 앨런 긴즈버그의 '위치타 소용돌이 경전Wichita Vortex Sutra'을 직접 번역해 게재하며 작품 해설을 쓰기도 했는데, 앨런 긴즈버그 역시 밥 딜런과 같은 시대에 반전(反戰)의 메시지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하루키의 초기 장편소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밥 딜런의 음악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합니다. 하루키는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밥 딜런의 목소리가 "작은 아이가 창가에 서서 비가 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표현합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아예 밥 딜런의 음악을 배경으로 끝이 납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밥 딜런의 음악을 카스테레오로 반복해서 들으며 '내면의 종말', 즉 '세계의 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이윽고 그 비는 희뿌연 색의 불투명한 커튼이 되어 내 의식을 덮었다.
 
잠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그것은 한 번 상실되었다고는 하지만 결코 훼손되지는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깊은 잠에 몸을 맡겼다. 밥 딜런은 <폭풍우>를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무라카미 하루키 저 김수희 역/1997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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