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론은 향상 올바른 방향으로만 향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세 모자 성폭행 사건', '양산 쌍둥이 사망 사건' 당시 시민들은 분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누군가 사건을 은폐하거나 가해자를 비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분노한 사람들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 등에 관련 글을 퍼다 날랐고, 급속한 전파 속도만큼이나 분노도 증폭됐다. 하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조작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분노를 위한 전문가의 역할
문제는 잘못된 곳을 향한 여론이 방치되면 여론이 신념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신념화된 여론은 진상 규명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고, 여론의 틀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진상이 규명되게 하는 제약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합리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념화된 여론 하에서 그 여론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정보는 쉽게 배제당한다.
<참고>
[취재파일] 진영논리와 선택적 지각…조국 사태가 남긴 것
전문가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필요하다.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을 통해 시민들이 정확하게 분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들의 분노가 소모되지 않도록, 여론이 사회 변화를 위한 긍정적 에너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때론 이런 작업은 대중의 시선과 맞서는 작업일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엄청난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전문가들에게 기대하는 건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하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뒷받침하는 정확한 정보다. 이런 점에서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 혹시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정치성에 따라, 여론에 편승하거나 여론을 이용하지는 않았을까.
과거사 조사단의 이상한 '편지 공보'
편지를 보낸 사람은 과거 김학의 전 차관과 춘천지검에서 같이 근무했던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김학의 전 차관은 윤중천 씨에게 소개한 건 당시 춘천지검에서 근무했던 모 인사라고 적었다. 해당 인사는 검찰 과거사위원회 위원장인 김갑배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라며, 그런 인연으로 인해 해당 인사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해당 인사와 당시 조사단의 활동 방식이나 활동 기간 연장에 비판적이었던 걸로 알려진 김갑배 위원장 등 2명을 겨냥한 편지였다.
조사단의 공보는 대중을 위한 것이었나, 조사단을 위한 것이었나
이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정보가 추가로 필요하다. 우선 하루 전, 김학의 전 차관 임명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었던 조응천 민주당 의원이 수사 권고 대상에서 빠진 걸 두고 비판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정치적 고려에 따라 야당 인사만 선택적으로 수사 권고 대상에 포함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편지에서 김학의 전 차관에게 윤중천을 소개했다고 언급된 사람이 박영수 특검팀, 이른바 국정농단 특검팀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결국 위 메시지 내용은 조사단이 하루 전 수사 권고의 정치적 비판을 덮기 위해 검증도 안 된 자료로 언론 플레이를 했음을 자인하는 내용이다. 바꿔 말하면, 성범죄와 관련한 무고 혐의는 뺀 선택적 수사 권고와 야당 인사만 포함시킨 직권남용혐의 수사 권고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논란과 의혹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대검 진상조사단이 엄밀성과 객관성보다는 여론을 의식한 정치성에 휘둘렸던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2019년 3월 초, 활동 기간 연장 집착한 조사단
김학의 전 차관 사건도 조사가 지체된 사건 중 하나였다. 2019년 3월 초 기준 검찰 과거사위 내에서는 조사 기간을 연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사에 속도가 붙지 않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활동 기간을 추가로 연장해도 조사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게 없을 것이라는 회의론이 제기됐고, 2019년 3월 12일 검찰 과거사위는 3월 말까지인 조사 기간을 연장하지 않고 활동을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사단은 '공보 활동'을 통해, 김학의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조사 기간 연장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 4일, 조사단은 과거 경찰이 영상 자료들의 송치를 누락했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경찰이 자의 든 타의 든 사건을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여론을 이용한, 여론을 조장한 공보
검찰 과거사위가 활동 기간 재연장 불허 방침을 밝힌 2019년 3월 12일 오후. 조사단원, 더 정확히는 조사단원 A는 활동 기간 연장을 위한 승부수를 던진 걸로 보인다. '김학의 전 차관 공개 소환' 카드였다. 때가 언제가 됐든 필요하다면, 그리고 조율이 됐다면 소환은 필요하다. 조사(수사) 필요성이 인정된다면 공개 소환을 하지 못 할 이유는 없다. 당시는 조국 사태 전이어서 공개 소환에 크게 제한이 붙지도 않았다.
문제는 조사 대상자와는 연락이 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사단원 A는 김학의 측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어차피 안 나오겠지만',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공개 소환을 검토 중이라고 메시지를 남긴다. 공개 소환을 해서 김 전 차관이 출석하면 그 자체가 여론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고, 나오지 않으면 조사마저 거부했다는 사회적 공분과 조사단으로 선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면피를 위한 명분을 모두 쥘 수 있는 카드였다.
활동 기간 연장은 어떻게 이뤄졌나
조사단원 A의 예상대로 김학의 전 차관은 2019년 3월 15일 출석하지 않았다. 하루 전날 경찰청장의 김학의 동영상 언급으로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다 보니, 조사단에 출석하지 않은 김 전 차관에 대한 비판은 한층 고조됐다. 그리고 주말을 지나고 난 후인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김학의 사건' 등에 대한 '조직의 명운을 건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고, 일주일 전 활동 기간 연장 불허 방침을 알렸던 검찰 과거사위는 활동 기간 연장을 결정했다. '과거사위 '활동 기간 연장 불허 방침'(2019.3.12.)⇒경찰청장 '김학의 동영상' 언급· 조사단 '김학의 공개 소환 통보'(2019.3.14.)⇒김학의 '조사단 불출석'(2019.3.15.)⇒문 대통령 '엄정 수사 지시'· 과거사위 '활동기간 연장'(2019.3.18.)' 순으로 이어진 셈이다.
'최종보고서'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전문가
물론, 조사단원들이 채팅방이 아닌 유선 연락으로, 혹은 직접 만남으로 사건을 활발히 논의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단원들 간의 주된 논의 채널은 채팅방이었다는 전직 조사단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김학의 사건에 대한 최종 보고를 바친 이후인 2019년 5월 28일, '최종 보고는 했지만 보고서 내용을 제대로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한 조사단원의 이야기는 그간 조사단이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 '최종 보고서' 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과거 기록'을 제대로 보기는 했을까.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를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지며 해당 사건을 '김학의 전 차관의 성 접대 혐의' 사건으로 규정한 의견이 최종 보고서에 상당 부분 포함됐다는 걸 뒤늦게 안 다른 조사단원은 자기는 보고서에서 이름을 빼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기록과 사실에 기초한 촘촘한 재조사, 더 이상 반박이 불가능한 논란의 종식과 가해자 처벌.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것이었지만,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과거사위와 조사단은 우리의 기대를 빗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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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검찰 과거사위와 진상조사단의 불편한 진실
제도와 여론이 만날 때, 전문가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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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자연 재조사 ① - '장자연 리스트'란 무엇인가?
[취재파일] 장자연 재조사 ② - '특수강간 의혹'과 수사 개시 검토 권고
[취재파일] 장자연 재조사 ③ - 총체적 부실 수사와 조선일보의 외압
[취재파일] 메신저 윤지오의 메시지, 그리고 무엇보다 故 장자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건, 전문성을 가진 외부자의 시각으로 사안을 접근해 주길 바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런 기대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는 위원회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의 헌신이다. 특히, 법률과 수사 전문가인 검사들이 만든 기록을 재검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찰 과거사위와 조사단이라면 참여하는 전문가들의 더 높은 전문성, 더 높은 적극성은 당연히 전제되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의 과오를 덮는데 이용되거나 논란과 의혹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폭시키는데 동원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검찰의 부정의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출범한 검찰 과거사위와 조사단의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역할을 했을까. 우리는 김학의 사건, 나아가 故 장자연 사건을 통해서 전문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여론의 시각이 특정 방향으로 지배적인 상황을 때 전문가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2년 전 우리 사회는 사건 자체의 휘발성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할 기회를 놓쳤다.
▶ '김학의 사건' 취재파일 시리즈 보기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① '김학의 사건'은 어떻게 지금까지 왔나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② 착취와 이용 사이, 토론 없는 평행선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④ 과거사 청산과 '기억의 정치'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⑤ '절차적 정의와 객관성, 그리고 공론화가 남긴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