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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성실한 야심가, 놀런의 ★은 이루어진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35

놀런 감독은 어떤 질문에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대답을 종종 봤습니다.

"그건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대답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게 본인에게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두고 싶어하는 부류의 사람인 듯 했습니다. 저에게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게 어떤 질문이었는지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놀런 감독은 거친 로케이션 촬영 현장에서도 대부분 드레스 셔츠에 수트를 입습니다. 추울 때는 그 위에 오버 코트를 걸칩니다. 메타의 수장 저커버그와 반대죠. 이렇게 촬영장에서 수트를 선호한 유명 영화 감독으로는 알프레도 히치콕이 있습니다. 둘 다 영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군요. 역시 '영국 신사'인가요.

놀런 감독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저도 -이 더위에- 수트를 입고 갔습니다. 하지만 놀런은 검정색 폴로 티셔츠에 짙은 갈색 재킷 차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차림이 살짝 긴장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감독과 배우들을 인터뷰했지만 명색이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감독이라('뉴욕매거진' 설문조사) 저도 살짝 긴장이 됐거든요.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가 뻣뻣하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신중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질문을 경청하고 최대한 정확하고 꼼꼼하게 답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인터뷰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범 답안같은 답변도 있었습니다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저는 놀런 감독을 성실한 '야심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그렇습니다. 과거와 미래, 시공간을 종횡무진하며 영화적 상상력을 펼쳐냅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배트맨이 있는가 하면 오펜하이머도 있습니다. 먼 미래의 '인터스텔라'와 까마득한 과거 '오디세이'를 넘나듭니다. 저는 그의 영화 속 고뇌하는 인간들이 바로 놀런 자신의 영화적 자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의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오디세이는 감독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감독님의 어떤 영화적 야망을 충족시켜주는 작품입니까?

저에게 오디세이는 서양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텍스트(foundational text) 입니다. 무엇보다 역대 가장 위대한 모험 이야기 중 하나이고, 거의 3천 년에 걸쳐 세대를 넘어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이야기입니다. 영화 감독으로서는 저는 영화 문화의 공백을 찾습니다. 관객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거죠. 그리스 신화의 세계가 현대적이고 영화적인 방식으로(in a modern cinematic sense)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오디세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는 1954년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율리시즈'와 1997년 랄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쉬가 나오는 '더 리턴' 등이 있습니다. 놀런 감독의 기준은 달랐나 봅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 감독으로서 찾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모험 이야기 중 하나를 현대 관객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연결감을 느끼고 이야기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겠다는 구체적인 야망을 가지고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항상 해보지 않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이야기 세계는 제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고, 스크린에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놀런 감독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오디세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겠죠. 놀런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넘나드는 폭넓은 세계와 이야기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는 안목을 길렀다고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디세이는 구전된 서사시(詩)입니다.

오디세이 시를 영화로 각색하는 관점에서 읽었을 때, 저와 아주 많은 부분이 공명했습니다. 이 시는 현실적이고 접근하기 쉽습니다. 저는 그 점을 관객에게 끌어내는 아주 현실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과거의 문학을 대할 때 우리는 너무 자주 그것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지나치게 경건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 각색의 진정한 도전이자 즐거움은 관객에게 영화 속에서 이 시를 읽는 경험, 신선한 이야기로 처음 접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해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오디세이가 원래 시(詩)라는 사실이 어떻게 영화에 반영됐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오디세이는 원래 구전 서사시인데요, 영화에서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오프닝의 각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점을 시나리오에 반영하겠다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언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내린 결정 중 하나가 트래비스 스콧이 연기한 음유시인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오디세이는 이야기하기에 관한 시이기 때문입니다. 글로 쓰이기 전에 음유시인에서 음유시인으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는 개념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디세이가 결국 그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이 시는 구전 반복을 통해 다양한 시대와 문화를 거쳐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그것은 제가 가장 일찍 내린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텔레마코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도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노래와 시를 통해 전달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디세이는 무엇보다 모험담의 원조입니다. 놀런 감독은 오디세이가 모험담인 동시에 사랑 이야기이고 성장 이야기이며 귀향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 점이 시가 쓰인 당시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시가 수천 년에 걸쳐 관심을 이어온 이유는, 다루는 주제들이 보편적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하고 중요한 것들이죠.

그런데 놀런의 오디세이 각색에 대해서 영미권에서 갑론을박이 일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놀런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다양한 오디세이 번역본을 참고했다고 밝혔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 번역본(2017년)의 저자 에밀리 윌슨이 영화를 보고 나서 놀런의 각색이 과장되고 피상적이라고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서 비판한 겁니다. 펜실베니아 대학 고전학과 학과장인 에밀리 윌슨이 번역한 '오디세이'의 첫 구절이 "그 복잡한 남자에 대해 말해주세요(Tell me about a complicated man)"인데 칼럼 제목이 "단순한 남자(An uncomplicated man)"이니까 상당히 신랄하게 풍자한 거죠. 여기에 다른 학자들이 놀란의 각색은 놀란의 자유라고 반박하기도 하면서 이 논쟁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 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어디까지 했지요? 네, 이쯤 됐을 무렵 시간에 쫓겨 준비한 질문 몇 개를 건너 뛰고 아이맥스 얘기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맥스 포맷은 70년생인 놀런 감독이 태어나기 1년 전에 발명됐고, 놀런은 16살 때쯤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본 뒤에 아이맥스로 영화를 만드는 오랜 꿈을 간직해왔다고 합니다.

-다크 나이트 이후 거의 20년간 아이맥스 여정을 이어오셨는데, 이번에 전체 분량을 아이맥스로 촬영하면서 특별한 감회가 드셨을 것 같습니다.

'다크 나이트' 이후로는 아이맥스 카메라를 최대한 많이 사용하려 했지만, 주로 액션 시퀀스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크 나이트' 때 28분을 시작으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오펜하이머'에서 한 시간 안팎의 분량을 아이맥스로 찍어왔습니다) 이번 영화에 착수 하면서 아이맥스 측에 가서 "만약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로 찍는다면 바로 이 작품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더 조용하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들이 개발해준 블림프 시스템, 즉 카메라 소음을 차단하는 첨단 박스 덕분에 대화 장면도 촬영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시점에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방식으로 찍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형 포맷 필름으로 촬영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눈이 보는 방식에 가장 가까운 포맷이라는 점입니다.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최적의 포맷입니다. 포맷을 바꿔가며 일부 구간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에 걸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이 감독님의 아이맥스 여정의 일단락인 것 같은데, 영화 촬영을 마치고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같은 게 있으셨나요?

아이맥스 촬영을 마쳤을 때는 분명히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야망을 완성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촬영한 뒤에는 네거티브 필름을 편집해야 했습니다. 매 단계마다 나름의 완성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영화가 전 세계 관객에게 상영되고 있는 순간이 진정한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요일에 한국에서도 개봉하는데, 관객이 영화를 완성시켜줍니다. 관객의 반응이 영화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그때 비로소 여정이 완성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놀런 감독의 영화라면 이 질문을 빼놓을 순 없겠죠. 왜 A.I. 시대에 VFX 대신 로케이션 촬영과 아날로그 제작 방식을 고수하는가 하는 것이죠. (VFX 사용이 나쁜 건 아닙니다. 놀런처럼 아날로그 방식으로 찍으려면 그만큼 많은 자본이 투입돼야 합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감독은 현재 세계적으로도 놀런 감독 정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놀런의 대답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기술에는 다양한 용도와 형태가 있고, 저희도 온갖 종류의 기술과 최신 기법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제가 영화 제작에서 항상 유지하려는 것은 톤(tonality)에 대한 집착입니다. 실제 장소와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하기 때문에, 카메라로 담아낼 수 없는 판타지 요소들을 구현해야 할 때 시각효과팀과 협력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실제로 촬영하려 합니다. 이것은 영화의 톤을 유지하고자 하는 저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관객은 톤에 매우 민감합니다. "우리가 정말 어딘가에 실제로 있는 건가? 배우들이 실제 공간에 서 있는 건가, 아니면 애니메이션 세계인가?" 하는 느낌 말이죠. 더 인공적이고 애니메이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도 완전히 유효하고 실행 가능한 방식입니다. 저는 더 현실적인 톤을 선택할 뿐이고, 그 도전은 시각효과를 써야 하는 시퀀스에서도 그 톤을 이어갈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놀런은 이번 '오디세이'에서도 키클롭스나 거인족과 대결, 바다 회오리 등의 장면에서도 '저걸 어떻게 실사로 찍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대한 아날로그로 찍었습니다. 또 놀런 얘기대로 VFX로 점철된 것 같은 영화도 사실 최대한 실사 촬영을 해 놓고 이를 바탕으로 VFX를 제작해야 제작 기간과 제작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놀런은 실사로 구현하기 힘든 장면들도 최대한 아날로그로, 물리적 실체가 있는 촬영으로 관객에게 현실감과 임장감을 제공하는 거고요 ('테넷'에서 실제 보잉 747기를 충돌시킨다거나 '오펜하이머' 때 원자폭탄 폭발 씬을 물리적 특수효과로 실제 촬영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놀런의 대답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

여기까지 대답을 듣다 보니 벌써 놀런 감독과의 짧은 인터뷰 오디세이의 마지막 여정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 현장에 와서 감시 아닌 감시를 하던 유니버설 픽쳐스 본사 관계자의 허락을 얻어- 추가한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놀런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영화 감독으로서 지금 본인의 오디세이 중 어디에 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당신의 이타카에 도달했을 때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의 원칙은 항상 한 번에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영화를 더 넓은 작품 세계의 일부나 제가 걷고 있는 여정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냥 그 영화 자체만을 보려고 합니다. 관객도 그렇게 영화를 받아들이니까요. 물론 이전 작품을 알고 있는 팬들도 있고,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쓰는 영화 평론가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감독이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냥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제 작업을 다른 영화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은 저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답변드리기 어렵네요.

✻ 이 인터뷰는 지난 3일 오전 11시30분부터 45분까지 약 15분 동안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진행됐고 -놀런 감독이 좋아하는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처럼- 일부 편집했습니다만 가급적 문답 순서와 인터뷰 원문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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