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조망 깔린 캄보디아 범죄단지
학교는 졸업해도, 도박은 졸업할 수 없었습니다.
교복을 벗어도 도박 빚과 2차 범죄의 늪은 이 모(20) 씨를 뒤따라왔습니다.
이 씨가 처음 도박에 손을 댄 건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공짜로 웹툰을 보려고 접속한 불법 사이트에서 '꽁머니'(공짜 도박 포인트 충전) 이벤트를 한 것입니다.
재미 삼아 공짜로 도박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이 씨의 도박 빚은 8천만 원으로 불어있었습니다.
이 씨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는 오늘(13일)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에 짝퉁 명품을 진품인 척 팔았다. 물건만 보내면 사기는 아니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교실 내 '총판'(영업책)이 됐습니다.
불법 도박 사이트로부터 일정액 수수료를 받고 다른 학생들을 사이버 도박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학교가 사이버 도박으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이 씨도 졸업했습니다.
교실을 벗어나니 아무리 도박 사이트 마케팅을 해도 수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교실만큼 도박을 전파하기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이 씨는 "그러다 통장 협박에 대해 알게 됐다"며 "한 건만 해도 하루에 200만 원에서 500만 원을 벌 때가 있으니 이 길을 택했다"고 털어놨습니다.
통장협박은 도박 사이트 운영자 등에게 수금 계좌를 동결하겠다며 협박한 뒤 돈을 뜯어내는 신종 범죄 수법입니다.
최근에는 일반인·자영업자 계좌까지 무차별적 표적이 됐습니다.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계된 이들은 '핑돈'으로 불리는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사이트 계좌로 입금한 뒤 금융당국에 신고해 계좌를 묶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 보호를 위한 계좌 지급정지 제도를 악용한 것입니다.
시민단체 '도박 없는 학교' 조호연 원장은 "보이스피싱을 하던 범죄자들이 최근에 많이 유입됐다. 새로운 범죄 사업 모델이 된 것"이라며 "학교 졸업하고 밥벌이가 어려운 20대들이 통장 협박을 일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심지어 합법 단체로 위장한 뒤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불법 도박 사이트의 계좌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공개하면서 돈을 갈취하는 조직들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외에도 보이스피싱·마약 수거책, 대포통장 유통책, 불법 사채업 등으로 도박 빚을 갚으려는 20대들도 적지 않습니다.
도박 자금 마련을 위해 본인 명의 통장을 판매하거나, 불법 사채업자 밑으로 들어가 채무자의 가족 정보, 집 주소 등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 소속 한 상담사는 "도박 빚 때문에 아르바이트하다가 보이스피싱 수거책 등에 연루된 사례들이 있다"며 "센터를 찾은 사람들도 범죄 관련 내용이기 때문에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상황"이라고 조심스럽게 전했습니다.
앞선 이 씨 사례처럼 2차 범죄의 씨앗은 10대 시절부터 뿌려졌습니다.
도박 중독과 함께 경제관념이 무너지고, 범죄에 대한 문턱도 낮아지는 것입니다.
염희정(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씨가 지난해 발표한 '인터넷 도박중독 청소년의 2차범죄 연구'에 따르면 심층 면담에 참여한 도박 중독 10대 9명은 폭행, 신분증 도용, 성매매, 전자담배 판매, 무임승차, 무면허 운전 등 다양한 범죄에 빠졌습니다.
성매매를 했다는 한 10대는 "도박해서 벌면 돈이 우습다고 느껴졌다"고 전했습니다.
최근 경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도박 자진신고를 받은 결과 도박 자금 마련을 위해 상습가출 및 차량 털이를 일삼던 17세 A군, 도박 빚 400만 원을 갚아주지 않는다며 모친을 폭행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15세 남학생 사례가 드러났습니다.
도박 빚에 시달린 일부는 20대가 돼 피싱 범죄의 온상으로 떠올랐던 '캄보디아 범죄단지' 등으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현지 카지노 등에서도 도박을 이어갔습니다.
캄보디아 범죄단지에 있던 한 20대 남성은 "돈을 쉽게 벌다 보니 현지에서 도박은 거의 다 하는 것 같다. 웬치(범죄단지) 안에 카지노가 따로 있다"며 "한국에서 온 대부분은 빚이 있거나 신용 불량자였다"고 전했습니다.
신성범 한국도박중독치유센터장은 "캄보디아 사태에 연루됐다 가족들이 강제로 센터로 끌고 온 사례도 있었다"며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20대들도 있다. 다만 주변 지인한텐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뿐"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내담자 중 범죄에 연루된 청소년이 얼핏 70%는 넘는다"며 "중고 컴퓨터 본체 1대를 50만 원에 올려놓고 27명한테 50만 원씩 가로챈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전문가들은 10대 도박 중독자들이 학교의 문턱을 넘기 전이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단순 강경 대응 위주보다는 심리적 치유 과정을 수반해야 성인이 돼도 도박이나 2차 범죄의 늪에 다시 빠질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사이버 도박 문제를 연구해온 조윤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청소년들, 특히 비행 청소년은 도박 빚으로 인한 우울증이 굉장히 심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해결 안 되고 20대로 넘어가면, 직장 생활을 하던 도중에도 갑자기 도박 관련 문제 행동들이 나올 수도 있고,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며 "빚 문제로 부모와의 갈등도 굉장히 심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조 교수는 "결국 피해자도 되고, 가해자도 된다"며 도박 이전에 학교·가족 관계 등 문제를 중심에 두고 국가 차원의 예방 전략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애초에 통장 협박과 같은 2차 범죄 행태가 불가능하도록 제도의 빈틈을 보완하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현행 지급정지는 전화 문의를 통해 신고자가 예금주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계좌 비밀번호 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접수가 가능합니다.
신고자가 실제 피해자 본인인지, 타인의 개인정보를 도용해 악의적으로 상대방 계좌를 묶으려는 제3자인지를 가려낼 세부적 검증 장치가 부재한 것입니다.
법무법인 명원 우지원 변호사는 "금융 당국이 이의제기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 중인데,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간소화해도 부당한 계좌 지급정지가 걸리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신고 접수 단계에서 본인확인 절차를 실질화하는 제도 정비가 선행돼야 하고, 이의제기 절차 개선은 보완적으로 작동해야 실효성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김병국 법률사무소 번화 변호사는 "지급 정지가 필요한 금액에 대해서만 정지하는 방법도 현행법상 가능하다"며 "은행들이 일부 정지에 대해 소극적으로 판단하고 거의 안 한다. 그러다 보니 통장이 아예 묶여버리는 게 기본 문제"라고 짚었습니다.
(사진=SNS 갈무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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