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세계 최대의 방송기자재 박람회인 ‘2014 NAB SHOW’가 개막됐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행사지만 올해에는 전 세계 150개국, 9만 7천여명이 참석해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운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참고 : NAB는 전미방송협회의 약자입니다). 오늘은 그 행사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흘에 걸쳐 열리는 이번 행사의 한 토막, 그것도 개막식의 한 장면에 불과했지만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한 인물에 대한 얘기입니다.
오프닝 행사가 열린 컨벤션 센터 홀은 오전 9시가 되기 전 천 여 석의 객석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NAB 회장인 고든 스미스 (전 아이오와 주 2선 상원의원)의 긴 개막 연설이 끝난 직후 사회자는 NAB가 주관하는 권위 있는 상인 ‘NAB Distinguished Service Award’의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Jorge Ramos’….저로서는 생소한 이름이 거명되고 곧 이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대형스크린 위에 펼쳐졌습니다. 각종 사건 사고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고 그 장면 장면마다 마이크를 들고 뭔가 열심히 말하고, 또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청년은 점점 장면이 바뀌면서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갔지만 표정은 더 생생하고 전달은 더 풍부해진 듯 했습니다. 오뚝한 코, 날카로운 눈매, 우수에 잠긴 듯한 눈동자, 그리고 짧고 간결한 그러면서도 매우 공격적이고, 또 때로는 감성적인 언변들…그 장면들이 너무도 인상적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휴대전화로 그가 누구인지를 검색해봤습니다.
Ramos는 1986년 Noticiero Univision에서 첫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게 눈에 들어왔고 곧 이어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젊은 뉴스 앵커였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또, ‘타임’이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의 히스패닉에 들었다는 것, 그리고 뉴스위크가 선정한 정치-언론 분야 Top 50인에 선정됐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그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Ramos는 미국에 이민 온 뒤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1986년, 28살 젊은 나이에 앵커가 됐다는 설명도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 멕시코인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경멸과 멸시를 딛고 그는 당당히 미국 언론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앵커로까지 발돋움했던 겁니다. 그의 영향력은 그가 인터뷰 했던 인물들에게서도 간접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깅그리치, 앨 고어, 존 케리와 사라 패일린, 존 매케인 등등..그리고 시상식장 화면에 펼쳐진 장면 가운데, 그와 인터뷰하면서Ramos의 어깨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는 피델 카스트로도 보였고, 반면, 그와 인터뷰 도중 마구 화를 내며 마이크를 떼어내고 퇴장하는 휴고 차베스도 보였습니다.
곧이어 그의 젊은 시절, 그가 누볐던 취재현장도 펼쳐졌습니다. 엘살바도르 내전, 걸프전, 코스보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이른바 20세기 후반 세계의 이목을 끈 5대 전쟁터를 누볐는가 하면,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붕괴, 911 테러, 카트리나 허리케인 등 역사적인 현장마다 그가 서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NAB가 그토록 권위를 자랑하는 상을 받을 만 하겠지요. 그럼 이 상은 어떤 사람에게 주는 걸까요? 한마디로 방송에 영향을 미친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레이건 전 대통령, 밥 호프, 월터 크롱카이트, 오프라 윈프리, 에드워드 머로우, 매리 타일러 무어, 찰즈 오스굿 등이 이 상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그저 그가 열심히 취재한 저널리스트였다는 이유만으로 이 상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왜 이 상을 받게 됐을까를 좀 더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Ramos는 흔히 ‘히스패닉 뉴스의 샛별’, ‘히스패닉 TV 방송 제일의 특파원’으로 불립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도 그렇게 소개합니다. 한 히스패닉 단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라틴계 리더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2위’에 랭크 되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2천만명이 넘는 히스패닉들이 그의 보도를 보고 듣기 위해 그의 프로그램을 찾는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NAB 상을 받게 된 이유, 그리고 누구나 그가 히스패닉계 최고의 언론인이라는 찬사를 부인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일관되게 히스패닉을 향해, 그리고 히스패닉을 위해 언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그가 쓴 10여권의 베스트 셀러, ‘가면의 이면’, ‘내가 본 것들’, ‘미국의 또 다른 얼굴’ 등을 통해서도 미국 사회에서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히스패닉들이 여전히 사회의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과 이유를 비판적으로 꼬집고 있습니다.
상을 받은 뒤 연단에서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상을 받으면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히스패닉은 가장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스패닉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대우는 형편없습니다. 오바마 케어는 어디로 간 겁니까?...상을 받는 자리에서 제가 또 분위기를 깨는군요. 여하튼 오늘 이 상을 준 NAB에 감사 드립니다.” 연설의 마지막 대목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와 같은 히스패닉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라고 불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57세. 우리 언론계에서는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중년의 나이지만, 타이트한 셔츠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의 다부진 몸매, 그리고 청년 같은 도전의식과 중후한 경륜이 어우러진 강하고도 부드러운 눈매와 말투…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그가 언론인으로서 남긴 족적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결같이 평생을 자신의 뿌리인 히스패닉을 위해 언론이 할 수 있는 사명을 다하고 있는 그 일관성, 게다가, 지금도 미국과 남미의 40개가 넘는 주요 신문에 컬럼을 쓰면서 히스패닉의 삶에 뭔가 도움을 주려는 열정을 저는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그의 연설이 끝나자 마자 전 자리에서 일어나 공감의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Ramos 그가 죽을 때까지 흔들림 없이 존경 받는 언론인으로 계속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실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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