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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열심히도 안 사는 주제에 번아웃? 대표적인 오해와 편견

<번아웃의 모든 것>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번아웃 피곤 피로 고민 불면증 (사진=픽사베이)
저희 상담소와 연구진이 번아웃을 연구하기 시작한 지 어느새 5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된 것 아니냐고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번아웃을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으로 포함시킨 게 2018년, 딱 5년 전입니다.

즉, 번아웃이 의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연구된 지가 이제 만 5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실생활에서는 아직 번아웃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정의를 명확히 아는 경우는 많지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오해와 편견들이 여전한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가장 큰 오해 한 가지를 다루어 볼까 합니다.

저는 종종 번아웃을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거나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요. 그러다 보면 가장 많이 접하는 댓글은 이런 것들입니다.
 
"꼭 열심히 안 사는 것들이 드러누워서 번아웃이라고 함"
"번아웃 언급하려면 일단 뭔가 굉장히 열심히 뭘 해서 이뤄놓고 말을 합시다."
"주변에 번아웃 번아웃 거리는 사람들 보면 꼭 일은 안 하고 딴짓함."

핵심은 열심히, 독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번아웃의 '번' 자도 말할 자격이 없다-라는 건데요. 상담 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댓글은 타인을 비난하고 상담 오신 분들은 자기를 비난한다는 것이지요. 번아웃을 호소하며 상담 오시는 분들 중 "전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너무 과하게 열심히요."라고 말하는 분들보다는요, 이런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재열님, 저는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번아웃이 왔지? 싶어요."

번아웃으로 상담에 오시는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포인트입니다. 나는 수동적으로 그냥 회사 오라면 오고 집에 가라면 가고 월급날 기다리면서 그냥저냥 시간 때우고... 열심히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 자신이 번아웃을 겪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 같으세요?

황당하다는 분이 많겠죠? 그리고 '이거 그냥 게으른데 핑계 아냐?'라는 생각도 들 겁니다. 그런데 제가 상담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 번아웃은 열심히 사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하면, 또 이렇게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럼... 저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안 살았는데도 번아웃이 오는 취약한 사람이면 저 같은 사람이 열심히 살면 아예 죽을 수도 있겠네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이렇게 나약할까?' 자책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는 못합니다. 번아웃은 굉장히 열심히 무언가 '행위'했을 때 소위 요즘 말로 빡세게 뭔가 행동했을 때에만 오는 거다라는 것의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신체 건강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무릎 관절은 열심히 조깅하고 러닝 하는 사람들만이 다치는 것이다."

실제로 무릎 관절, 열심히 뛰는 분들이 손상될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체중이 과하게 늘어났거나 나이가 들어서 근력이 약화되고 있는 분들이라면 거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손상될 수 있습니다. 이를 굳이 공식으로 정리해 보면
무릎관절 손상량 = A(무릎관절 사용량) x B(주변 근육 감퇴량) x C(체중 증가량)

이 될 수 있겠죠?

직장 생활에서 겪는 번아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바삐 사는 것도 번아웃의 주요 원인일 수 있지만, 주변 근육이 감퇴하거나 살이 찌는 것 때문에 무릎 관절이 상하듯이, 무언가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번아웃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밸런스냐고요? 에너지 투여량 대비 리워드(보상)의 밸런스죠.

결국 열심히 살지 않아도 번아웃이 온다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삶에서 투입하는 노동량 또는 에너지량에 비해 충분하지 못한 보상을 받고 있지만 그만두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해야하는 의무감만 남은 상태는 아닌지. 이 보상은 꼭 급여가 아니더라도 심리적 보상이나, 일에서의 보람, 의미 같은 정서적 리워드까지 포함합니다.

이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번아웃을 자주 겪는 집단은 전업주부라고 전문가들이 입 모아 말하는 겁니다. 뚜렷한 보상은 없지만, 가사노동은 매일매일 해도 끝이 없지요. 끝없는 노동량에 비해 가족의 인정, 감사, 물질적 보상 등 어떤 것도 충족되지 않아 공허해지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는 번아웃을 마주했을 때 생각의 시작점을 이렇게 바꿔 보자는 겁니다.

<나는 얼마나 빡세게 살았길래 번아웃이 왔는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에너지와 일상에서 얻는 보상 간의 밸런스가 얼마나 무너졌는가?>

그러다 보면 자신의 번아웃 앞에서도, 타인의 번아웃 앞에서도 무턱대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행동을 잠시 멈출 수 있지 않을까요?

▶ [인-잇] 번아웃은 병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세요?
▶ [인-잇] 번아웃이 왔을 때 제일 먼저 해야하는 것
 

인잇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청년 3만 명을 상담하며 세상을 비춰 보는 마음건강 활동가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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