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을 왜 그곳에 보낸다는 건지 다시 궁금해졌습니다. "판결문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서 좀 쉽게 바꿀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보내기로 한 거예요." 순간 '이건 기사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동안 법률더미에 묻혀 살고 있는 판사들에게는 판결문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한글인데, 한글 같지 않은 게 바로 판결문이었죠.
그걸 법원 스스로 깨닫고 '외래 수술실'로 보낸다니 놀랄 수밖에요. 물론 지금도 어렵긴 하지만 10여 년 전보다는 많이 선명해진 요즘의 판결문은 당시 남부지법이 보여준 용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보도를 마치고 며칠 지나 그 공보 판사와 저녁 자리를 가졌습니다. "아니, 어쩌자고 그런 참신한 생각을 하셨어요?" 판사님의 대답은 대충 이랬습니다. "기자들도 가끔 헛갈려서 판결문 기사를 오보 내고 그러더라고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 정도로 판결문이 어렵다는 얘기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 저도 판결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나 다시 읽을 때가 많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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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결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고사성어입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나온 말이지요. 뜻이 맞는 사람끼리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약속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때 판사님과 맺은 도원결의는 이랬습니다. '판사님은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을 때 존댓말 판결문을 작성하시고, 저는 그 소식을 제일 먼저 타전하는 기자가 되겠다'
그 뒤로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공보 판사님은 강산이 한 번 변한 뒤에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쯤이었을 겁니다. "판사님, 존댓말 판결문은 도대체 언제쯤 쓰실 건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판사님은 "어, 사실 1월부터 조금씩 쓰고 있었어요." 마음은 왜 진작 말씀을 안 하셨느냐고 따지고 있는데 말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와...대박."
그렇게 약속의 1년을 훌쩍 넘긴 지난 4월, 다시 이 판사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의 우여곡절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지만, 6일 보도한 <존댓말로 쓴 판결문...70년 전통 깬 판사> 뉴스는 이렇게 출생 신고를 마쳤답니다.
인터넷 댓글을 살펴보니, '권위를 스스로 벗어던진 모범', '이런 착한 변화가 사법부의 변혁을 이끌 듯' 등 칭찬이 많았습니다. 반면 '형식이 아니라 공정한 판결이 우선', '아무리 그래도 판결인데 존댓말은 좀 아닌 것 같다' 등의 의견도 있었죠. 이런 다양한 견해들을 참고해서 다음 편에서는 '존댓말' 판결문이 왜 의미가 있는지, 보완할 점은 없는지 등에 대해 다서 ssul을 풀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