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7년 발생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현장에서 경찰 과학수사대가 주차장을 조사하고 있다.
67살 류건덕 씨는 아직도 9년 전 그날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2017년 12월 21일 오후, 충북 제천의 한 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류 씨는 오후 서너 시쯤 잠시 결재를 위해 컴퓨터를 켰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한 스포츠센터 겸 사우나에서 큰 불이 났다는 속보가 떠 있었다. 류 씨의 아내는 불이 난 스포츠센터 회원이었다.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류 씨는 곧장 스포츠센터로 차를 몰았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여성 사우나가 있는 2층 대형 유리창을 깨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류 씨의 아내는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평소 다니던 교회에서 도시락 봉사를 마치고 사우나에 들른 길이었다.
29명이 목숨을 잃었고, 40명이 다쳤다. 제천시 인구는 지난해 기준 12만 8천 명 정도다. 한집 건너 한집에 희생자나 희생자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 동네가 초상집이었다. 슬픔을 달랠 겨를도 없이 류 씨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았다.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한 데로 모아 언론과 정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잠시 맡는 일인 줄 알았다.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유가족 대표'라는 직함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야 할지, 류 씨는 꿈에도 몰랐다.
"위로금 75억 합의 직전…'책임진다' 한 줄 탓에 무산"
위로금 청구에는 '언제까지 (청구)해야 한다'는 기한이 있다. 시간이 지나자 유가족은 소송에 돌입했다. 소방 당국의 부실 대응책임을 물어 충북도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수년에 걸친 송사 끝에 결국 최종 패소하고 말았다. 소방당국의 과실은 인정되지만, 화재 발생과의 인과 관계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유가족들은 1억 7천여 만원의 소송비용까지 떠안게 됐다. 마지막으로 두드린 게 국회였다. 당시 국민의힘 권은희 의원의 주도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피해자 보상을 위한 결의안'이 2023년 12월 국회 문턱을 넘었다. 참사 6년 만이었다.
그러나 국회 결의안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 이듬해 2월,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참사 6년여 만에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위로금 지급을 약속했다.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9월 위로금 지급 근거를 담은 조례안이 충북도의회에서 부결됐기 때문이다. 당시 "위로금 지원 조례를 만들면 잘못된 선례로 남을 수 있다", "유가족을 지원하게 되면 사법부 판단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등의 반론이 도의회 내에서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유가족 3명 스스로 목숨 끊어…"소주 안 마시면 잠을 못 잤다"
그 사이 유가족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족을 잃은 고통을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트라우마 심리학 이론 중에는 '인정받지 못한 슬픔' (Disenfranchised Grief)'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보상이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등이 부족할 경우 유가족은 그들의 슬픔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고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유가족에게 '위로금'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장례를 치르고 고인을 떠나보내듯, 끔찍했던 참사의 기억을 마무리 짓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절차였다.
류 씨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간 아내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진짜 하루도 제가 소주 안 먹고 그냥 그냥 자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류 씨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였다. 유가족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무려 8년 넘게 이어졌다.
9년 만에 급물살…청와대 경청통합수석 간담회에서 제천시 의회의 조례 제정까지
제천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지난해 8월 29일 전성환 청와대 경청통합수석과 간담회가 이뤄졌다. 충청북도와 제천시 관계자들도 참석한 가운데, 유가족들은 정부와 도 협의체 구성, 위로금 지원을 요청했다. 위로금 지급 문제는 이 자리에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류 씨에 따르면 전성환 수석은 간담회에서 "참사가 일어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게 해결되지 못했나"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 충북도측에서 위로금 지급과 관련해 '배임 우려' 취지의 언급이 나오자, 전 수석은 '공무원들이 적극 행정을 하는데 어떻게 배임이냐'며 문제해결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로금 지급은 이후 급물살을 탔다. 지난 1월 28일, 제천시의회에서 '유가족 지원 조례'가 참사 약 8년 2개월만에 의결됐고 2월 6일 조례가 공포됐다. 다만 충북도의회 차원의 조례가 없어 4월 추경을 통해 간접 예산 지원 방식으로 위로금을 주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았다. 햇수로 참사 9년 만의 일이었다. 제천시는 올 3~4월쯤 위로금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지급 규모와 시기 등을 정하기로 했다, 제천시 의회 조례라는 유족 지원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기 때문에 가능해 진 일이다.
유가족들은 언론에 "늦었지만 이번 결정으로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위로가 된다면 괜찮겠다"면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 고맙다"고 밝혔다. 류 씨는 "세월이 너무 오래됐다. 유가족들도 계속 여기에 매여 살 수는 없으니까 빨리 끝을 내고 가야 된다고 봤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 씨는 "정치적 성향으로 따지면 나는 보수에 가깝다"면서도 "해결의 계기를 마련해준 이재명 대통령과 청와대 경청통합수석실에 너무 고맙다"고 덧붙였다.
국민 상처 보듬는 것도 정치의 역할
정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국가나 사회의 운영 자체를 말하기도 하고,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얻는가, 즉 권력을 쟁취하는 것 자체를 정치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주권자인 국민의 한(恨)과 어려움을 풀어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기도 하다. 싸우고 빼앗고 서로 비판만 하는 정치가 아니라, 여야를 떠나 국민의 아픔에 주목하고 소통해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주권자가 가장 원하는 정치의 역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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