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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2600년 전 외교 전략에 트럼프 '깜짝'…강공 고집하다 "말로 하자"

중국 전국시대의 7웅은 '합종'과 '연횡'이라는 2가지 외교 정책을 오가며 치열한 수싸움을 벌였습니다. 당시 최강국인 진나라를 상대로 나머지 6개국이 힘을 합쳐 대항하면 '합종', 6국 연대가 깨지고 각국이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협력하고 동맹을 맺으면 '연횡'이 외교전을 주도했습니다. 진나라는 군사적으로 다른 6개국을 앞섰음에도 '연횡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부전이굴인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야 말로 최상 중의 최상'이라는 손자병법 제 3편 모공편의 가르침을 병법의 정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2600년 전 이 외교 전략의 현실판을 우리는 최근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랜 기간 '세계의 경찰'이자 '국제법 수호자'로서 우방국들과 연횡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 독재 국가들과 싸우며 함께 피를 흘렸던 유럽 나라들과는 혈맹을 맺었습니다. 나토라는 군사적 동맹체를 결성해 소련 등 공산권과의 냉전을 함께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은 미국과 안보, 군사, 경제적으로 '연횡책'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펴왔습니다.

유럽연합기(EU기)와 성조기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트럼프 미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는 이 관계의 임계치를 넘어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매입을 주장하더니 군사적 행동까지 불사하겠다면 우방 덴마크를 위협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유럽 8개국에 보복 관세까지 예고하고 나섰습니다. 지난 17일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등에게 "다음 달부터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상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6월 1일에는 관세를 25%로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관세 기관총의 난사 대상은 모두 유럽 내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들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서유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합종책'이 동원됐습니다. 우선 유럽연합이 지난해 미국과 맺은 무역 합의 승인을 보류했습니다. 베른트 랑게 EU의회 무역위원장은 "미국이 대립 아닌 협력의 길로 돌아올 때까지 무역 합의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당초 다음 주로 예정됐던 표결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미국이 EU 회원국 영토와 주권을 위협하고 관세를 강압적 수단으로 사용해 무역 관계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지난해 미국과 협상 당시 마련한 930억 유로(약 160조 원) 규모의 보복 관세 패키지, 서비스와 외국인 직접 투자 등의 무역을 제한하는 통상위협대응조치 발동까지 추가로 검토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이 동맹을 '파트너'가 아닌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 취급하자, 유럽 국가들은 개별적인 대미 협상, 즉 연횡만으로는 국익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EU를 중심으로 공동 방위 기금을 강화하고 무역 보복에 공동 대응하는 '합종'적 연대를 강화하고 나선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지 시간 21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뜨끔한 듯 합니다. 그동안 으름장을 놓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오던 유럽 나라들이 손을 잡고 저항에 나서자 급히 '강공'에서 '유화'로 선회했습니다. 유럽 8개국에 부과하기로 예고했던 추가 관세를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매우 생산적인 회담을 바탕으로 그린란드와 북극 지역 전체에 관한 미래 협상의 틀을 마련했다"고 자세를 낮췄습니다.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다음달 발효할 예정이던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앞서 스위스 다포스 포럼의 특별연설에서는 군사력을 통한 그린란드의 강제 병합에는 나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상의 '전략적 후퇴'를 한 셈입니다.

미국 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유럽과 전면전으로 잃는 게 더 많다는 계산이 있습니다. '관세 전쟁'을 선언하자 글로벌 금융시장이 폭락하고 미국 내 물가 상승 압력이 거세지면서 국내 정치적 부담이 커졌습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에 무력을 쓰지 않겠다고 밝힌 후 뉴욕증시는 일제히 반등했습니다. 유럽의 '합종'이 그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도 위협적입니다. 유럽이 중국 등과 연대해 미국에 무역 보복을 하거나 미국 국채를 팔아 치울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됐습니다. 유럽을 힘으로 굴복시키려다 자칫 스스로 더 큰 내상을 입을 수도 있자 부랴부랴 "말로 하자"며 협상 테이블로 복귀한 것입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 이익 우선'을 외치며 마구 윽박지르던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크게 체면을 구겼습니다. 이제 말발이 쉽게 먹히지 않게 됐습니다. 전략적으로 성과를 거둔 유럽은 앞으로 더 자주 '합종' 카드를 꺼내들 게 분명합니다. 그저 고분고분 미국 요구를 따라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화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신뢰'를 잃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번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유럽 등 우방국들은 이미 미국의 정책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신뢰는 쌓기도 어렵지만 한 번 깨지면 복구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세계가 미국에, 적어도 트럼프 정부에는 더이상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기기 어렵지 않나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안보적 독립을 꾀하는 '독자 노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유인이 커졌습니다.

국제 질서는 '힘의 논리'가 매우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강대국의 강요와 횡포에 약소국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합종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힘으로만 밀어 붙이면 상대를 뭉치게 만듭니다. 진나라가 덮어놓고 무력을 동원하기보다 '합종'을 막고 '연횡'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인 이유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600년 전 동양의 외교 전략에서 교훈을 더 얻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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