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대통령과 뤼터 사무총장
'당신은 도널드 트럼프를 '아빠'(Daddy)라고 불렀고, 칭찬 일색인 문자도 보냈다. 미국 대통령에게 아첨과 칭찬을 해야지만 일이 된다고 생각하나?'
지난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을 향한 첫 질문입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논란이 된 그의 '아빠'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과 양자 회동 중 나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이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싸우는 두 아이처럼 크게 싸웠다. 너무 격렬하게 싸울 때는 말릴 수가 없다. 2∼3분 정도 싸우게 놔두면, 그러면 말리기가 수월하다"고 말했습니다.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유에 웃으면서 "그리고 아빠(Daddy)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가끔은 강한 언어를 써야 한다"며 맞장구쳤습니다.
그는 정상회의 본회의장에서도 "친애하는 도널드, 당신이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찬사'의 문자 메시지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뤼터 사무총장은 아첨이라는 비판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표현 방식은) 취향의 문제"라고 항변했습니다.
되레 "그(트럼프)가 재선되지 않았다면 이 정상회의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정말 생각하느냐"라며 "전적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곧장 이어진 트럼프 대통령의 별도 기자회견에서 뤼터 사무총장은 또 한 번 '굴욕'을 당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 동맹들을 자녀들로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뤼터)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만약 아니라면 알려주겠다. 다시 돌아와 그를 세게 한 대 치겠다"고 농담조로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기자회견에 배석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나토 정상회의가 끝난 뒤에도 논란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 정치권에서 '아빠'라는 표현이 일종의 유행어가 된 듯한 분위기입니다.
가령 26일 EU 정상회의에서는 상반기 순회의장국 임기를 마치는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를 향해 "의장국을 맡는 동안 '유럽연합(EU)의 아빠(Daddy)'가 된 듯한 기분이었나"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투스크 총리는 "내 이름이 (영어식 표기로) 도널드(Donald)이고, 우리 아버지도 도널드다. 내 생각에 아빠는 한 명이면 충분한 것 같다"며 웃으며 답했습니다.
이번 사태를 그저 뤼터 사무총장 개인의 '굴욕 외교'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유럽 안보의 취약성을 방증한다는 지적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 주둔 미군 감축 가능성을 시사하고 인도·태평양으로 군사전략의 중심을 옮기겠다고 공언하면서 유럽의 불안이 증폭된 상황입니다.
뒤늦게나마 유럽 각국이 '자강안보' 필요성을 깨닫고 국방비 증액에 나서고는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성격 탓에 미군 기습 감축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뤼터 사무총장과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안인 'GDP 5% 국방비'에 맞춘 합의안을 고안해내고, 유럽 진영이 대체로 큰 반발없이 합의한 기저에도 일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습니다.
바르트 더 베버르 벨기에 총리는 EU 정상회의에서 기자들과 만나 유럽이 방위력을 갖추지 않으면 "어느새 또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고, 그것을 좋아하는 척해야 한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특히 베버르 총리는 "10년 뒤 또 다른 아빠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우리 스스로가 아빠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유럽이 국방비 증액에 합의하면서 일단은 시간은 벌었지만 이행 과정에서 오히려 미국과 유럽 진영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럽 싱크탱크 에그몽연구소의 스벤 비스코프 연구원은 미국 NBC방송에 "GDP 5% 국방비가 트럼프를 만족시키려는 것이었다면 오래가진 못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는 "국방비를 올리지 않으면 트럼프는 '내가 왜 도와야 하느냐'고 할 것이고, 반대로 방위력을 강화하면 '유럽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나는 발을 빼겠다'고 할 것"이라며 유럽이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