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혁 중국본색 썸네일](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4_128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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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이성 샹양시 외곽에 있는 고융중의 석패방. 청대에 세워졌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5_1280.jpg)
234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이 산시(陝西)성 치산(岐山)현의 오장원에서 죽었다. 촉군은 제갈량의 시신을 몐(勉)현의 딩쥔산(定軍山)에 급히 묻은 뒤 철수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촉나라는 263년에 쳐들어온 위군에게 항복했다. 위는 촉을 멸망시키자마자 방치됐던 제갈량의 봉분을 정리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 최초로 세워진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候祠)다. 여기서 '무후'는 생전에 촉 황제인 유선에게 받은 작위 무향후(武鄕候)에서 비롯됐다.
![고융중의 제갈량 초려는 산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6_1280.jpg)
유선은 제갈량이 죽자, 충무후로 봉했다. 이에 따라 후세인은 제갈량은 '무후'로 존칭하게 된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2곳에 무후사를 더 세웠다. 하나는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삼고초려했던 허난(河南)성 난양(南陽)이었고, 다른 하나는 촉의 수도였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였다.
그 뒤로도 중국 각지에서 무후사가 우후죽순처럼 건립됐지만, 중국인은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서 몐현, 난양, 청두의 무후사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재 제갈량이 주군으로 모셨던 유비의 사당은 단 한 곳밖에 없다.
![청대에 세운 삼고초려를 기념한 삼고당(三顧堂)](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7_1280.jpg)
그나마 이름마저 제갈량에게 내주었다. 바로 청두의 무후사로, 본래 223년에 유비의 묘로 조성된 한소열묘(漢昭烈廟)였다. 유비가 죽은 뒤에 추존된 시호가 한소열제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선은 청두 외곽에 무후사를 세웠다. 이를 5세기 지방 정권인 성한이 시내로 옮겨왔고, 명대에 한소열묘와 합쳐서 중국사에서 유례없는 군신합묘가 만들어졌다. 그 후 유비보다 제갈량을 더 높게 평가해서 무후사로 불렸다. 실제로 중국인은 청두의 무후사가 제갈량 사당인 것은 알아도 유비의 묘가 함께 있는 사실은 잘 모른다.
![제갈량 일가족이 날마다 마신 우물 제갈정으로 육각이 특징이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8_1280.jpg)
유비의 사당인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조차 '명랑천고(明良千古)'라고 쓰여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明君良臣流传千古)'의 줄임말로,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난양의 무후사는 제갈량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중국 내 무후사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무엇보다 제갈량이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정진했던 초려(草廬)에 지어졌다.
제갈량은 181년 산둥(山東)성 린난(沂南)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 제갈량이 어릴 때 병사했다.
![난양 무후사의 산문. 청대 지어진 무후사의 옛 입구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3_1280.jpg)
그로 인해 제갈량은 작은아버지인 제갈현을 따라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荆州)로 옮겨 유소년기를 보냈다. 청소년기에는 샹양(襄陽)에 가서 수경선생으로 불린 사마휘 밑으로 들어가 학업을 닦았다. 이때 같은 문하에는 서서, 석광원 등 쟁쟁한 학우가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지식과 인물 됨됨이가 단연 으뜸이었다.
스승의 곁을 떠난 뒤 제갈량의 행적은 이견이 분분하다. 샹양에서는 융중(隆中)에 남아 10년 동안 살았다고 말하고, 난양에서는 융중에서 지내다가 난양으로 이사해 초려를 짓고 살았다고 반박한다.
![난양 무후사에는 역대 시인 및 정치가가 방문해서 남긴 비석이 많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5_1280.jpg)
두 지역 주민은 이를 두고 수백 년 동안 불꽃 튀는 입씨름을 벌였다. 그 근거로 샹양은 제갈량이 속세로 나오면서 유비에게 바친 융중대책을 내세운다. 융중대책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요약된다.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을 찾아가 설득한 기록이 있다. "만약 위군을 (유비와 힘 합쳐) 격파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징저우와 오의 세력이 강대해져 삼국이 솥발처럼 정립하는 형태가 됩니다." 실제로 샹양에서 서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곳에 융중이 있다.
![제갈량의 팔괘진을 본떠서 지붕을 8각으로 복원한 초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4_1280.jpg)
명대부터 샹양 주민은 이곳을 정돈해서 '고융중'이라는 제갈량 성지를 조성했다. 이에 반발해서 난양 주민이 내세운 근거는 무후사와 함께 역대 시인 및 정치가가 와룡강(臥龍崗)을 찾아와서 쓴 명문이다.
와룡강은 난양시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언덕배기다. 무후사는 대문, 석패방, 산문, 대배전, 제갈초려, 영원루 등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제갈량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곳에 세워진 고백정, 제갈량 가족이 식수를 해결했던 우물 제갈정, 제갈량이 책을 읽으면서 학문에 몰입했던 독서대 등을 조성했다.
![삼고초려를 방문한 유비와 그를 만나는 제갈량의 모습을 담은 찰흙상](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39_1280.jpg)
당대 이래 무후사를 방문했던 유명 인사가 글을 남겨놓은 비석을 모은 비랑(碑廊)은 고융중이 따라올 수 없는 역사적 장소다.
특히 당대 시인 유우석이 지은 '누실명(陋室銘)'은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 무후사를 찾아 두보가 지은 '촉상(蜀相)'과 함께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힌다. '누실명'은 눈에 보이는 초려가 초라해 보이지만 여기서 춘추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 나온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려에서 지식을 배양하고 힘을 키웠던 제갈량처럼 모든 후대인도 공명심을 멀리하고 더욱 학문에 정진할 것을 노래했다. 시에는 제갈량 초려가 난양에 있었음도 명시했다.
![대배전 가운데에 제갈량이, 오른쪽에 제갈첨, 왼쪽에 제갈상이 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0_1280.jpg)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고,(山不在高, 有仙則名)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水不在深, 有龍則靈)
이 누추한 방에는 오직 내 덕의 향기만 있도다.(斯是陋室, 惟吾德馨)
(…)
번잡한 소리에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공문서에 몸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난양 제갈량의 초려요, 서촉 자운의 정자로구나.(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공자도 말씀하길, 군자에게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孔子云, 何陋之有)
![난양 무후사를 방문해서 출사표를 쓰는 악비를 재연하는 모습](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1_1280.jpg)
1138년 악비가 와룡강을 방문했다. 악비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남송의 장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출병해서 금군을 무찔렸다.
악비는 무후사에서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을 떠올리며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다. 이에 붓과 종이를 꺼내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전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반드시 금을 정벌해 제갈량이 못다 이룬 북벌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해서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남송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에 뒤로 가면 행서로 바뀐다.
![청두의 무후사에 있는 악비가 쓴 출사표. 서체의 처음과 끝이 다르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207/202037346_1280.jpg)
악비는 붓으로 쓴 출사표를 석재에 새겨서 무후사에 남겼다. 이를 청나라 조정이 2개로 복각해서 하나는 난양에 보관했고, 다른 하나는 청두의 무후사로 보냈다.
하지만 이런 악비의 우국충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남송 조정의 주도권을 쥔 주화파의 거두 진회가 악비에게 무고한 누명을 덮어 씌어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난양의 무후사는 숨겨진 스토리와 볼거리가 많다.
난양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술까지 있다. 이름부터 제갈량을 가리키는 와룡술공장(臥龍酒廠)이 론칭한 초려대(草廬對)와 와룡옥액(玉液)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더 깊고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는 스브스프리미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30829/201826819_128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