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민간 여객기, 휴전선 넘어 북한으로…56년째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3일 방송된 'Bring my father home'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장민호, 배우 문정희, 박주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선을 넘은 비행기

때는 1969년 12월 11일, 김포공항. 한 여인이 막 공항으로 들어서고 있어. 이름은 이순남, 나이는 35세야. 순남 씨는 공항으로 남편 장기영 씨를 마중 나온 거야.


기영 씨는 그해 여름에 식당을 개업했어. 그런데 며칠 전에 곤경에 빠진 종업원을 돕기 위해 강원도로 갔어. 그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어.

"전화가 왔는데 '일 처리는 잘 됐으니, 내일 아침 10시 비행기로 김포 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니 마중 나와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이순남, 장기영 씨 아내

그래서 오전 일찍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거야. 그렇게 남편이 오길 기다리는데, 이상해. 몇 시간이 지나도,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아. 아침 10시에 온다더니, 벌써 오후 4시야. 그런데 갑자기, 공항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라디오에서 전해진 뉴스 때문이야. 그 뉴스를 들은 순남 씨는 큰 충격에 빠져.

"긴급 보도입니다. 오늘 강릉공항에서 이륙해 김포로 향하던 여객기가 휴전선을 넘어 함경남도 원산으로 향했습니다."

강릉공항에서 이륙했다는 비행기. 바로 남편 기영 씨가 탄 비행기야. 이 비행기, 대체 왜 북으로 간 걸까? 당시 상황이 담긴 정부 문건이 있어. 이 문서는 그날 오후 3시 23분. 당시 내무부 장관이 외무부 장관과 통화한 내용이야. 흘려 쓴 글씨지만 다급한 내용이 느껴져.

"금일 YS-11기 KAL 비행기가,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올 것이 원산 북쪽 순덕(?)이라는 이북 공항에 납북되었음. 탑승객은 조종사 1명, 부조종사 1명, 승무원 2명, 승객 47명. 도합 51명이었음."

51명을 태운 민간 여객기가, 납북된 거야. 즉, 하이재킹을 당했어.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어쩌다가 납북이 됐나.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까지 납북이 돼서. 이 세상사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순남, 장기영 씨 아내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시간을 돌려 사건을 되짚어 볼게.

▲ 하이재킹 납북 사건

이날 오전 강릉공항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고 해. 오전 9시 35분 출발 예정이었던 김포행 비행기가 취소됐거든. 일부 승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급히 서울로 가는 승객들은 다음 비행기에 올랐어. 그중에 순남 씨의 남편, 기영 씨도 있었어.

마침내 12시 25분, 비행기는 강릉공항 활주로에서 이륙했어. 바로 이 비행기야.

대한항공 소속 국내선 여객기, 기종은 YS-11. 동해 방향으로 이륙한 YS-11기는 기수를 서울 쪽으로 향한 채 구름 속으로 사라졌어. 그런데 이륙하고 10분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 대관령 상공을 비행하던 YS-11기가 갑자기 기수를 돌려. 다시 동해로 향하더니,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해.

12시 49분. 공군 레이더망이 이 움직임을 감지했어. 여객기에 연락을 시도해 봐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 5분 후, 강릉 비행장에서 F-5 전투기 두 대가 긴급 출격해. 그리고 막 휴전선을 넘으려는 YS-11기를 발견했어. 이 상황에서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까? 공군 참모총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어.

"그때는 이미 그 비행기는 휴전선 부근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저희들 전투기가 이것을 포착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 공군의 전투기였다 할 것 같으면, 저희들이 공중에서 격추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전술조치도 취할 수 있었습니다만, 민간여객기의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 사격이라든지 또 적극적인 방해활동을 한다든지 그런 것은 못 하게 되어 있고, 또 그런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민간인이 탄 여객기라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야. 그렇게 YS-11기는 휴전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어.

혹시, 내가 탄 비행기가 납치당하는 상상 해본 적 있어? 요즘 시대에 그런 하이재킹이 와닿지 않을 수 있어. 그런데 당시에는, 하이재킹이 유행처럼 일어났어. 우리나라도 이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어. 1958년,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던 여객기 창랑호가 납북됐던 일이 있어. 비행기에 탑승한 남파 공작원들이 조종사를 총기로 위협해 북으로 넘어갔어. 그 후 11년이 지나, 한반도 역사상 두 번째 하이재킹이 일어난 거야.

이 일은 즉각 국내외 언론에 보도됐어. 이 소식을 듣고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 바로 납치된 승객들의 가족들이야.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했어. 당시 절박한 심정이 담긴 편지가 있어.

"제 남편이 북괴에 납북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제 옆에는 태어난 지 5일밖에 안 되는 우리의 첫아기가 평화스럽게 잠들어 있습니다. 그이는 전보를 받고 아기를 보고픈 마음으로 달려오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아빠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내는 아기 아빠가 오기 전까지는 아기의 이름을 짓지 않겠다며, 하루빨리 돌아오게 해달라고 호소했어. 승객 중엔, 어린 4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할머니 제사를 치르기 위해 강릉에 왔다가 납북된 부부도 있었어. 그 4남매 중 첫째 아들이 쓴 편지가 있어.

"우리 네 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린 동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북괴에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종일 울기만 합니다. 떠나시던 10일, 500원을 제게 맡기셨는데 이제는 200원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자꾸 눈물만 납니다. 우리는 이제 의지할 곳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납치된 승객 가운데, 이 분도 있었어.

당시 영동MBC의 PD였던 황원 씨야. 당시 나이 32살. 아래 사진은 납북되기 얼마 전에 2살 된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야. 그는 직장 상사를 대신해 서울 출장을 가던 길이었어. 그렇게 집에 두 살 된 아들과 막 100일이 지난 딸을 두고 납북되어 버린 거야. 이 사진 속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그때 당시에는 저희 할머니, 어머니 다들 난리가 난 거죠. 이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이 됐었고. 그때 당시에 저희 할머니가 기절해 버리셨으니까. 둘째 아들이 출장을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가 납치를 당했다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뭐 마음이 아주 갈래갈래 찢어지는 거죠."
-황인철, 당시 2세, 황원PD 아들

당시 남북관계는 최악이었어. 바로 1년 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 있었거든.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습격했던, '1.21 사건'이 일어났어.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울진 삼척지구에서는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 민간인을 학살한 일도 있었어. 그때 희생자 중에는 겨우 네 살 된 아이도 있었다고 해. 그러니, 당시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납치돼 북한에 끌려간 거야. 가족들이 느끼는 충격과 슬픔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거야.

▲ 납치범의 정체

그러면, 납치범은 누굴까? 납북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북한 방송에서 범인을 밝혔어.

"남조선 항공회사에서 근무하던 비행사 '유병하'와 '최석만'이 지난 12월 11일 미제와 박정희 도당의 침략과 반인민적 반동통치를 반대하여 YS-11기를 가지고 공화국 북방부로 의거하여 왔다."
-조선중앙통신 12월 12일 보도 내용

'의거하여 왔다'는 말은, 조종사들이 자기들의 의사로 비행기를 끌고 왔다는 거야. 이 발표, 믿을 수 있겠어? 정부에서도 믿지 않았어. 지난 1958년 창랑호 납북 사건 때도 북한은 똑같은 주장을 했는데, 나중에 대남공작원들의 소행으로 밝혀진 적 있거든. 경찰은 수사본부를 세우고, 납치범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어. 그리고 12월 15일 사건 발생 나흘 뒤, 경찰은 수사 결과를 대대적으로 발표했어.

"치안국장은 15일 그동안의 경찰수사 결과 지난 11일에 일어난 KAL 소속 YS-11기 납북사건의 범인은 강릉 자해병원 원장 '채헌덕'과 이 비행기의 부조종사 '최석만', '한창기'라는 가명을 쓴 '조창희' 등 3명으로, 이중 '채'가 주범이며 '조'는 직접 권총을 휴대한 하수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병원원장 채헌덕, 부조종사 최석만, 그리고 조창희. 이 세명을 범인으로 발표했어. 병원원장이 왜 납북을 시도했을까? 말 그대로 경찰의 '추정'일 뿐이야.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 그럼에도 채헌덕을 주범으로 꼽은 이유는 뭘까?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고향이 함경남도였대. 당시는 한국전쟁 후라, 고향이 북한인 사람이 많던 시기인데, 그의 일가족 중에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병원을 차린 것도 의심스러웠대. 세 번째 이유, 비행기를 납치하려면 조종기술자가 필요해. 그래서 부조종사 최석만을 포섭한 걸로 추정된대. 그 근거로 든 게, 채헌덕과 최석만이 같은 전투비행단 출신이라는 거야. 그런데 서로 근무한 기간이 겹치진 않아. 그래도 아마, 건너 건너 알았을 것으로 추정된대. 다 '추정'이야. 근거가 참 빈약해. 당시 치안국장이 발표한 내용이야.

"부조종사 '최'는 8, 9, 10일 삼 일간 서울-강릉선을 계속 탔는데, 11일에는 정 조종사를 제쳐놓고 조종간을 잡았으며, '조'가 9일 속초에서 서울에 시외 전화를 걸었는데, 수신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부조종사와 범행에 관련된 연락을 한 것으로 보이며, '채'는 범행 전날인 10일 강릉에서 모 씨와 회식을 하다가 전화 건다고 나가 30~40분간 자리를 떴고, 그 후 '채'의 알리바이가 분명치 않아 '조'와 접선한 것으로 본다."

일부 상황만으로 추정한, 일부러 짜 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결과지. 당시 이 치안국장의 발표 내용은, 국회에서도 질타를 받았어. 확실한 증거는 없고 온통 추정에 불과하니까.

▲ 송환을 둘러싼 갈등

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바로, 납북자들의 안전한 송환이야. 하루빨리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야 하잖아. 납북 직후 각 부서는 즉각 행동에 나섰어. 당시 북한과 직접 교섭할 채널이 없던 정부는 UN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협조를 요청해. 국제적으로 여론을 조성해 북한을 압박하려 한 거야. 당시 북한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북한은 UN 측의 송환 요구에 대해 이렇게 말해.

"당신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오."

북한은 승객들을 인질로 정치적인 협상을 하려 한 걸로 보여. 이 과정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분노했어. 분노한 수만 명의 인파가 구호를 외치며, 너도나도 줄지어 송환을 촉구하는 서명을 했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탑승객들이 돌아오길 기원했어.

"북한 괴리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 궐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는데, 민족과 역사의 반역자 김일성을 꼭 타도해야 한다면서, 승무원과 승객을 억류하고 비인간적으로 고통을 줄 것을 생각할 때, 가슴 아픈 일이라고 통분했습니다. 한편 뜻이 있는 자유민들에 의해 납북된 우리 동포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은 온누리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한국 정부의 입장은 모든 인원에 대한 무조건 송환이야. 그런데 북한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 그렇게 남북 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사이, 피해자 가족들은 쓸쓸히 1970년의 새해를 맞이하게 돼. 그중 성충영 씨는 납북 사건 이후 웃음을 잃었어. 충영 씨의 딸이 YS-11기의 승무원이었어.

이름은 성경희, 당시 나이 23세. 경희 씨는 5남매의 맏딸로, 생계를 돕던 기특한 딸이었어. 아빠 성충영 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그래서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어. 내 딸이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 국제 사회에 호소하려 한 거야.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송환될 기미는 보이지 않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이제 2월 6일이면 설 명절이야. 피해자 가족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어. 그런데 설날을 앞둔 2월 3일, 성충영 씨의 간곡한 노력 때문이었을까. UN 측은 북한에 "온 가족이 설날을 함께 보낼 수 있도록, 2월 4일 오전 11시까지 탑승객 전원을 송환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어. 이런 UN의 강력한 촉구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이러했어.

"북괴는 지난 12월 11일 납북된 YS-11기 여객기의 승객들 중 돌아가길 원하는 승객들은 곧 일방적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북괴 평양방송이 3일 보도했다."

의외로 북한에서 송환하겠다는 반응이 있었어. 그럼 문제없이, 전원 송환될까? 승객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어. 게다가, 언제 어디로 돌려보낼 건지도 얘기가 없는 거야. 정부는 북한의 일방적인 송환을 대비해, 판문점 일대와 동해, 서해상에서 송환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어.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탑승객들을 돌아오지 않아.

UN이 제시한 기한에서 한참 지난 2월 14일.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어.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 갑자기 버스 한 대가 나타난 거야. 다리 건너편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해. 어떤 사람들은 기뻐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신 눈물을 닦고 있어. 바로 납북됐던 승객들이야. 2월 14일 오후 4시 44분. 마침내 송환이 이뤄진 거야.

"몸서리치는 납북 66일. 북한 괴뢰 간첩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던 항공기 탑승원 51명 중 39명이 악몽에서 풀려나와 자유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몇 번이나 돌려보낸다는 거짓말을 해온 북한 괴뢰는 갑자기 토요일 저녁을 기습해서 아무런 인수 절차나 인원수 확인도 없이 그나마도 기대하던 전원 송환도 하지 않고 짐짝같이 내려놓자마자 달아났습니다. 뒤늦게나마 귀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과 국내외 보도진들로 붐빈 판문점엔 마중 나온 가족들의 환성과 귀환자들의 한이 복받친 눈물에 싸였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51명 중 39명이 돌아왔으니, 12명이 돌아오지 못했어. 그 이유는, 송환된 승객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어.

▲ 상상초월 범인의 정체

1969년 12월 11일. 납북사건 당일의 일이야. 강릉공항을 이륙한 YS-11기가 막 비행 고도에 도달한 그때. 왼쪽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키 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고 조종석 문을 열고 들어가더래. 그리고 잠시 후 대관령 상공을 지나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뚝 떨어졌어. 난기류를 만났거든. 한동안 요동치던 YS-11기는 갑자기 기수를 돌리기 시작해. '날씨가 안 좋아 회항하나?' 생각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계속돼. 창문 오른쪽으로 계속 동해바다가 보여. 그럼 비행기가 북쪽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잖아. 승객들 중 일부는 불안해하기 시작해. '아까 조종석에 들어간 남자, 혹시 간첩 아니야?'라고 의심해. 하지만 손쓸 방법은 없어.

잠시 후, 창 밖을 내다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행기 양 옆으로 전투기 2대가 나란히 날고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 공군 비행기와는 모양이 달라. 전투기 옆에 박혀있는 붉은 별. 바로 북한 전투기였어. 그리고 잠시 후에 승무원이 울먹이며 이렇게 말해.

"저희 비행기가 납북됐어요. 이제 곧 착륙할 테니 신분증을 찢어버리세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승객들은, 신분증을 꺼내 찢기 시작했어.

"앞이 캄캄했다. 납북된 KAL기는 이날 낮 1시 5분께 함흥 남쪽 부근에 있는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듯한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잠시 후 비행기 문이 열리더니 무장한 북괴군 녀석들이 객실로 들어와 손수건을 꺼내 눈을 가리라고 불호령을 했다. 고개를 슬며시 돌려 밖을 몰래 내다봤다. 벌써 무장한 북괴군들이 피를 본 갈까마귀 떼처럼 몰려들어 기체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으며 흑색 세단차 한 대가 분명히 회색 코트를 입고 흰 마스크를 한 '간첩 조'를 군관 서너 명과 함께 태우고 어디로인지 쏜살같이 공항 밖으로 사라졌다."
-박익동 '악몽의 65일' 中

송환자 증언에서 밝혀진 중요한 단서, 바로 납치범의 정체 '간첩 조'. 바로 이 사람이야.

경찰이 공범으로 지목했던 인물, 조창희. 그는 51명의 탑승객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어. 알고 보니 '한창기'라는 가명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던 거야. 송환된 승객들은 이 사건이 그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증언했어. 주범으로 지목된 채헌덕 씨와 부조종사 최석만 씨는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거야.

그런데 이 납치범 조창희의 신상을 보면, 좀 의문스러운 내용이 있어. 조창희를 수사한 당시 자료야.

본적은 강원도 속초, 거주지도 속초. 그는 남파 간첩이 아닌, 대한민국 출생이었어. 심지어 육군 헌병으로 근무도 했어. 그는 속초 CID 대장으로 지내기도 했어. CID는 육군 범죄 수사대를 말해.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간첩이 됐을까? 6년 전에 군에서 전역 후, 북한에 포섭된 걸로 보여. 그는 처와 3남 1녀를 둔 가장이었어. 하지만 그들을 버린 채 홀로 월북을 선택한 거야.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조창희는 일정한 주거 없이 무의도식하며, 도박과 사기 협찬 및 유흥을 일과로 소일하던 사람이었으며…"
-조창희에 대한 수사 결과 中

조창희는 평소, '바람둥이 조상사'로 불렸대. 도박과 유흥에 빠져 큰 빚을 졌다고 해. 그래서 북한의 꾐에 넘어간 게 아닐까. 근데 마침, 조창희 아내의 증언도 나왔어. 탑승일 전날, 조창희가 권총을 손질하는 걸 봤다는 거야. 그는 아내에게 이런 말도 남겼대.

"내가 돌아오지 못해도 재혼을 하지 마라."

탑승 당일 조창희는 권총을 숨긴 채 YS-11기에 탑승한 걸로 보여. 어떻게 총기를 소지하고 비행기를 탔을까? 대한항공 사장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탑승 전 소지품 검사를 할 때, 한 승객이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대.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육군 준장이야!" 하면서. 그 승객은 VIP 대우를 요구하며 소리를 질렀고, 결국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는 거야. 정말 허술하지? 그렇게 조창희는 조종사를 권총으로 위협해서 비행기를 납치했어.

북한 비행장에 내린 조창희는, 마침 영웅처럼 인민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검은색 세단을 타고 사라졌어. 그 후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 악몽의 납북 66일

납북된 50명의 탑승객은 대합실에서 추위와 불안에 떨어야 했어. 그날 저녁 7시. 인민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났어. 그는 이렇게 말했어.

"25년 동안이나 떨어진 우리 겨레를 만나니 매우 반갑구만 그래. 그런데, 왜들 이리 시무룩하게 앉아들 있소? 다들 웃읍시다. 하하하!"

하지만 탑승객들은 아무도 웃지 못했어. 3일 후 새벽, 탑승객들은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이동했어. 그리고 평양 여관과 대동강 여관에 분산 수용돼. 방 배정은 1인 1실. 탑승객들끼리의 대화는 허용되지 않아. 감시가 항상 따라다녔고, 이들은 각자 성분 조사를 받았어. 직업, 가족관계 등 개인정보를 조사한 거야.

며칠에 걸친 성분 조사가 끝나자, 이번엔 사상교육이 시작돼. 김일성에 관한 책자도 건네. 우상화 교육을 받게 된 거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맞선 사람도 있었어. 바로 그, 황원PD야.

"강제 억류되어 있을 때 저희 아버지가 북한 당국에 국제법과 국제 관습법에 따라서 '우리 모두를 송환해 달라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를 하게 됐었고요."
-황인철, 황원PD 아들

모두가 겁에 질린 상황에서 단호하게 외쳤다고 해. 북한 체제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던 황PD는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한참 후에나 돌아왔어. 그동안 무슨 일을 당했을까. 어떤 일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 있어.

"미군 파카를 입은 손호길 씨가 특수훈련을 받은 인물로 오인받아, 고문을 당했다는 말이 나돌아 전전긍긍했다. 눈언저리가 부어서 식당에 나오는 승객도 있었는데, 그는 이가 아픈지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었다. 언동이 반동적이라고 맞았다는 것이다. 전기 고문을 당하고 약물 주사, 모진 매를 맞아 정신까지 흐려진 손 씨 등 심히 구타를 당한 숱한 동승 피랍자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다시 한번 그들의 만행이 몸서리 처진다."

납북된 피해자 중 한 명인 손호길 씨는 그들이 주는 약을 먹고 정신이 혼미해졌대. 그가 끌려간 곳, 고문실이었어. 전기의자에 앉혀진 그는 곧 정신을 잃었다고 해. 그 후 20일 만에 나타난 손 씨는, 멍한 얼굴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어.

"나 좀 살려주시오..."

사상 교육은 이렇게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어.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고, 설날이 됐어. 그런데 웬일로, 북한 측이 납북 피해자들을 연회장으로 부르더니 술까지 주더래. 고향에 두고 온 생각도 나고, 술도 한 잔 마셔 울적한 그때,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국민 가곡으로 불리는 '가고파'라는 노래야. 그곳에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황원PD였어. 그가 노래를 부르자 탑승객들 모두가 목놓아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 다들 울음을 삼키며 그 노래를 불렀대. 집에 돌아가고픈 마음을 노래로 달랜 탑승객들. 그런데 잠시 후 이 노랫소리를 듣고 북한군들이 들이닥쳤어. 그리고 황PD를 끌고 갔대. 그 후로는 황PD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대.

그렇게 악몽 같은 66일이 지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 거야.

"귀환 이튿날, 국내외 기자회견에서 귀환자들은 조창희의 단독 범행으로 강제 납북됐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붉은 마수에 감금됐던 66일간을 폭로하면서 새삼 치를 떨었습니다. 괴뢰여관에 한 사람씩 격리 수용당한 납북자들은 성분조사를 핑계로 잔인하게 전기고문을 가해 정신이상자까지 냈으며 떳떳이 항거하는 승객들에게는 뭇매를 가하는 속에서 승객들을 끌고 다니며 세뇌공작으로 쉴 틈 없이 괴롭혔다고 폭로했습니다."

"어떻게 고문을 했길래 저 사람이 저렇게 말도 못 하고, 완전히 정신이상자가 됐는지 말입니다."

부모가 납북됐던 4남매. 4남매도 66일 만에 부모를 만났어. 그렇게 귀환한 39명은 꿈에 그리던 가족과 만났어.

"그리던 조국 귀환 이틀 밤을 지낸 승객들은 가족들과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긴 얘기보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된 안부를 주고받느라 바빴는데, 노모를 부둥켜안은 채 말을 잊은 듯 울고만 있는가 하면, 친정에서 해산한 처음 보는 딸을 받아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빠도 있었고. 가족들이 몰려들어 왜 이 꼴인가 하고 부둥켜안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손호길 씨. 그는 북한 괴뢰 전기고문으로 정신불구자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귀환자들은 북한의 만행을 앞다퉈 폭로했어. 근데 말하는 도중에 북한 용어가 툭툭 튀어나와. 66일간의 사상 교육이, 평생 썼던 언어습관까지 바꿔놓은 거야.

▲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이 순간, 누구보다 가슴 아픈 사람들이 있어. 바로 미귀환자 가족들. 돌아오지 못한 11명의 가족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어. 돌아오지 못한 11명의 명단이야.

납치의 주범으로 오해받았던, 병원원장 채헌덕 씨. 그리고 공범으로 지목됐던 부조종사 최석만 씨도 돌아오지 못했어. 귀환자들의 증언으로 억울한 누명은 벗게 됐지만, 정작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어. 든든한 맏딸 승무원 성경희 씨. 그리고 순남 씨의 남편 장기영 씨. 사상 교육에 반발했던 황원PD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어.

"대합실에 모든 사라들이 명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누락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나중에 돌아오지 못한 11인의 이름이 뜨게 되니까, 그때 저희 할머니 기절하셨고. 저희 엄마 또한 기절하게 됐고.."
-황인철, 황인PD 아들

황PD의 아내는 그 트라우마로 심한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됐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인철 씨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대.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트라우마가 무척 심했어요. 산에 올라가면 떨어져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수영장을 가면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황인철, 황인PD 아들

인철 씨의 가장 큰 상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였어. '아빠는 어디 있냐' 묻는 인철 씨에게 어머니는 늘 같은 대답을 하셨거든. "아빠는 미국 출장 가셨어.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꼭 오실 거야"라고. 그 말을 믿은 인철 씨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대. 아빠가 선물을 들고 오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 기대는 매번 이루어지지 않았어.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우고,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서 등을 밀어드리고, 아버지에게서 술을 배우고.. 그냥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거.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그 일상이, 인철 씨에게는 평생 손에 닿지 않은 꿈만 같았어. 그게 인철 씨에게는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왔대.

39명이 송환된 이후 정부는 나머지 11명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어. 그래도 가족은 희망을 끈을 놓을 수 없어. 승무원 성경희 씨의 아버지 성충영 씨는, 미귀환자 11인의 가족회를 만들고 송환을 위한 활동을 계속 이어갔어. 하지만 1979년 성충영 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회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어. 현실적인 문제도 컸어. 미귀환자들은 대부분 집안의 가장이었어. 가장을 잃은 가족들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큰 문제였어.

장기영 씨는 의정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데, 납북되기 2개월 전 식당 건물을 지었다고 해. 그런데 남편이 납북되고 난 후,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왔어. 식당을 짓기 위해 빌려 쓴 돈이 당시 돈으로 무려 천만 원이었대.

"채무가 많았더라고요. 넘어가고 나니까, 빚쟁이들이 막 이렇게 오더라고요. 그래서 내 손이 다 닳도록 빚을 갚아야지, 이 신념 하나 가지고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 4남매를 키워왔죠. 많이 힘들었습니다. 힘든 걸 다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이순남, 장기영 씨 부인

"고생이야 뭐. 이루 말할 수가 없으셨겠죠.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되고 나서는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드셨으니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장재석, 장기영 씨 큰아들

순남 씨네 셋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심한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해. 혼자서는 운신조차 못하는 딸을 키우는 것도, 온전히 순남 씨의 몫이야.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미귀환자의 송환 문제는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혀 갔어.

▲ 기적처럼 찾아온 희망

세월이 또 흘러 어느 날, 미귀환자의 가족들에게 희망이 찾아왔어. 2001년, 미귀환자 11명 중 한 명이 극적인 가족상봉을 하게 된 거야.

2001년 평양 이산가족 상봉장.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한 여인이 있었어.

"엄마.. 나.. 경희야."
"너 내 딸 맞아?"

1969년 납북 이후 32년 만에 승무원 성경희 씨와 어머니가 만났어. 두 사람은 믿기지 않는 재회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어.

32년 만에 받아보는 딸의 큰절.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딸을 만나기 바랐던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졌어. 딸을 빼닮은 살가운 손녀와 듬직한 손자와도 처음 인사를 나눴어.

성경희 씨는 조심스럽게 아버지 소식을 물었어. 돌아가신 아버지 소식에, 경희 씨는 눈물을 또 참지 못했어.

극적인 모녀의 상봉 이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어. 성경희 씨 외에, 다른 승무원 3명의 생존도 확인된 거야. 이 소식은 미귀환자 가족들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줬어.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품게 된 거야.

▲ 아버지를 집으로 보내주세요

황PD의 아들 인철 씨도, 모녀 상봉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어. 그 장면이 더욱 가슴 아팠던 이유가 있었다고 해.

"제가 이제 TV 앞에 앉아서 이산가족 상봉 그 모습을 보게 됐는데, 제가 저희 아버지가 납치당했던 당시가 두 살 때였거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희 큰딸이 두 살 때였습니다. 그때 불현듯이, 두 살짜리 아들을 아무 이유 없이 보지 못하고 있는,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제가 느끼게 됐어요. 만약에 두 살짜리 아들을 날 못 보게 하면 어떨까. 너무 비참하더라고요."
-황인철, 황원PD 아들

이때를 계기로, 인철 씨는 결심하게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로. 아버지가 다시 집에 돌아오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거야. 그렇게 인철 씨가 미귀환자 가족 모임을 다시 만들었어. 본격적인 송환 운동에 뛰어든 인철 씨는 전국 각지를 돌며 납북사건을 알리는 전시회를 열고, 범국민 서명운동도 펼쳤어.

그리고 무엇보다 시급한 것,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야 해. 인철 씨는 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계신 아버지의 생사확인을 요청해. 그리고 2006년 북한에서 답변이 왔는데, "확인불가능"이라고 적혀 있었어.

"생사 확인 불가라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이해가 안 가잖아요. 북으로 납치당한 제 아버지가, 살아 계셔도 북한에 계실 것이고, 설사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북한에 계실 것인데, 생사 확인 불가라는 통지서는, 믿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황인철, 황원PD 아들

인철 씨는 바로 정부에 후속조치를 문의했어. 하지만 대답은 실망스러웠어. 'KAL기 납북자의 경우 이산가족으로 분류가 되어 있어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어.

정부청사, 통일부, UN사무소 앞에서 송환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어. 이런 활동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노력하겠다, 기다려라"였어. 정부의 무관심은 인철 씨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어. 특히 한 외교부 서기관의 말이 인철 씨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어.

"오래전 일을 가지고 왜 지금 와서 그러십니까. 혹시 당신,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 아닙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려는 게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냐고. 다른 이들에겐 오래전 사건일지 몰라도, 인철 씨와 다른 미귀환자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야.

정부의 무관심에 실망한 인철 씨는 국제기구의 문을 두드려. 유엔인권이사회에는 'WGEID'라는 기구가 있어. 강제적 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이야. 2010년 인철 씨는 이곳에 아버지의 생사확인을 요청해. WGEID는 인철 씨의 아버지가 강제적 비자발적 실종 상태라 판단했어. 그래서 북한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어. 이에 대해 북한은, 무조건 6개월 내에 답변해야 해. 무성의한 답변에는 또다시 조치를 요구할 수 있거든. 그렇게 북한을 압박했어. 그럼 북한은 답변을 보냈을까?

북한은 답변 기한 6개월을 훌쩍 넘기고, 2년이 지난 뒤에야 답변을 보냈어. 2년 만에 온 북한의 답변은 이랬어.

"언급된 사건은 강제적 실종 사건이 아니다. 공화국에는 강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실종되거나 자기 의사에 반하여 억류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은 북한에 대한 적대 세력의 음모이므로, 실무그룹의 고결한 인도주의적 실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철 씨는 그 후에도 UN을 통해 송환을 촉구했지만, 북한은 같은 말만 되풀이해.

"1970년 2월 14일에 얘기했던 답변하고 똑같은 답변이었어요. 남으로 돌아가지 않는 자들은 자의에 의해서 북한에 머무는 것이며, 이들의 생사 확인은 불가능하다…"
-황인철, 황원PD 아들

40년이 지나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문제가 제 개인적인 한 국민의 피해자의 목소리지만, 사실 이건 굉장히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거든요. 외교적인 부분 아니면 국가의 본분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부분인데, 제가 큰 비애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황인철, 황원PD 아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다 보니, 달걀로 바위 치기야. 그렇게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왔어. 인철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슈퍼맨'이었어. 수천 명의 북한 주민을 탈북시킨 인물이라 해. 그가 인철 씨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됐습니다."

인철 씨의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200km, 평양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살아계시다는 거야. 그리고는 인철 씨에게 물었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의 아버지의 자유의사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자유의사로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전 모든 걸 다 포기하더라도 노력할 거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하게 되면, 난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겠다.."
-황인철, 황원PD 아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정말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어. 슈퍼맨과의 통화 후 다시 2년이 지난 2013년. 그제서야 전화가 왔어. 수화기 너머에선 "지금 연결해 드릴 테니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어.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아버지와 직접 통화 연결이 된 거야. 두 살 때 헤어진 아버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저는 당시에 두 살이었으니까. 제가 아버지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인지 아닌지 제가 확인할 수도 있는 것도 안 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고 전화 통화도 길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황인철, 황원PD 아들

인철 씨는 조심스럽게 물었어.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인철 씨는 어릴 적, 한 두 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있대. 정적이 흐르더니,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 "그때, 그 '지팡이 장'자를 써서. 내가 '인장'이라고 불렀지."

"'인장'이라고. 거기서 아버지인걸 알게 된 거였죠."
-황인철, 황원PD 아들

44년 만에 듣는 아버지 목소리야. 드디어 아버지가 살아계신 게 확인된 거야. 황원 씨는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 그럼, 황원 씨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까.

안타깝게도 황원 씨는, 돌아오지 못했어. 2013년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바닷길이 막혀 버린 거야. 삼엄해진 경비로 탈북에 실패하게 돼. 아버지가 배를 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철 씨는 다시 한번 실의에 빠졌어.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가 격리됐다는 소식도 듣게 됐어.

"결론적인 거는 그 사건이 불발돼서 저로서는 굉장히 거의 멘탈이 나갔죠. 어떤 불상사가 나로 인해서 발생되지 않을까. 굉장히 두렵게 느껴지게 됐었죠."
-황인철, 황원PD 아들

그 후 인철 씨는 반년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해. 하지만 이걸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일이잖아. 그 후 인철 씨는, 그야말로 모든 걸 걸고 노력했어. 아버지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실 수 있도록.

"의장님, 제 이름은 황인철입니다. 제 아버지는 1969년 북한에 의해 납치됐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5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그를 집으로 데려올 때입니다. 1983년 북한은 항공기 불법 압수 억제 협약을 비준했습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북한은 제 아버지를 송환해야 합니다. 부디 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그래서 그의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2019년 3월 20일. UN인권이사회에서 황인철 씨의 연설

인철 씨는 지난 2020년에 WGAD에 진정서를 넣었어. WGAD는 강제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이야. WGAD가 공개한 결정문이야.

"북한 요원의 대한항공 여객기 공중 납치에 의한 황 씨의 신체적 자유 박탈은 법적 근거나 정당성이 없다. 북한은 황 씨를 계속 구금하여 세계인권선언 제9조 및 자유권 규약 9조 1항을 위반했다. 이에 황 씨를 조속히 석방할 것이며 완전하고 전면적인 수사를 통해 책임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인권의 차원에서 인철 씨의 아버지를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고 밝힌 거야. 이 결과는 인철 씨 혼자 이뤄낸 성과야.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어. 인철 씨는 이 일에 대해 정부와 국제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원하고 있어. 앞으로 그의 싸움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56년간의 고통을 끝낼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 전하고 싶은 말

이번에 '꼬꼬무'가 미귀환자 가족들을 만나며 이런 질문을 던졌어. '만약 가족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보고 싶다고. 보고 싶었다고. 제가 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계속 그리워했다고. 아버지 아들로서 닮기 위해서 노력 많이 했다고. 그런 말씀드리고 싶어요."
-황인철, 황원PD 아들

"어머니가 제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부재로 인해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 생각이야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그걸 다 메워 주셨고, 메워주시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습니다. 그건 마음속으로 제가 알고 있죠. 우리 가족들 다 알고 있습니다."
-장재석, 장기영 씨 아들

"기적이죠. 이 세월의 기적이 나한테 있게 해 주면 내가 춤을 추겠습니다. 만나면,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셨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성장한 모습을 보십시오. 자랑도 하고 싶고. 만나면 못 추는 춤도 추고 싶습니다."
-이순남, 장기영 씨 부인

2011년 미귀환자 가족회에서 이 사건이 잊히지 않기 위해 거리캠페인을 한 적이 있어. 그때, "왜 42년이 지나서야 목소리를 내십니까", 이런 말을 들었대. 그래서 이렇게 답했어.

"이건 42년 만의 첫 번째 목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미귀환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 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는 것이야.

"반세기가 지나니까 그걸 아는 국민들은 제가 보기에는 많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납북되어서 소식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고 그런 세월을 50년 이상 보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꼭 한번 살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재석, 장기영 씨 아들

"생사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세기가 지나는 이 세월 속에서. 생사도 좀 알고 싶고. 정부에서도 힘써주시면 좋겠어요."
-이순남, 장기영 씨 아내

"비행기를 탑승한 승무원과 승객들은 이륙 후 반드시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1969년도에 하이재킹 당한 저희 아버지와 11명은 아직도 목적지 공항에 도착하지 못했고,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돌아올 수 있도록. 같이 함께 염원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인철, 황원PD 아들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