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복싱 경기에서 어떤 선수의 왼쪽 눈이 찢어지면 상대 선수는 바로 그 왼쪽 눈을 집중 공격합니다. 경기를 빨리 끝내고 이길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독 리시브가 약한 선수를 향해 송곳 같은 서브를 넣습니다. 이를 '목적타 서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일반인들이 족구를 할 때도 흔히 '구멍'이라고 꼽히는 사람을 향해 공을 찹니다. 스포츠에서 약한 사람이나 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것은 모두 승리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인지상정'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984년 LA 올림픽 유도에서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3수 끝에 1984년 LA 올림픽 첫 출전
하지만 압도적 기량에 비해 올림픽과는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19살이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2위에 머물러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올림픽이 1년만 늦게 열렸다면 참가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전성기 시절이던 1980년에 모스크바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는 일본 대표로 선발됐지만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이 대회를 보이콧하면서 출전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야마시타의 첫 올림픽이자 마지막 올림픽은 1984년 LA 올림픽이었습니다.
불의의 부상, 극적인 금메달
결승전에 출전하기 위해 매트에 오를 때 야마시타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천신만고 끝에 결승에 오른 그와 달리, 결승 상대였던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랴슈완은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끝냈습니다. 야마시타가 제아무리 훌륭한 선수라고 해도 오른쪽 다리를 못 쓰는 상황에서 전 경기 한판승으로 한껏 기세가 오른 라슈완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야마시타로서는 평생의 꿈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이 사실상 날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라슈완으로서는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만 집중 공략하면 무난히 이길 것으로 보였지만 라슈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 대신 왼쪽 다리를 걸려고 하다 되치기를 당해 매트 위에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굳히기 기술에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경기 시작 1분 5초 만에 야마시타가 누르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야마시타로서는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평생 숙원을 푸는 순간이었습니다.
은메달리스트의 아름다운 스포츠맨십
"야마시타가 오른쪽 종아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나요?"
라슈완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전력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야마시타가 오른쪽 다리를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를 공격하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야마시타의 부상 때문에 이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라슈완으로서도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국 이집트에도 36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해 국민적인 영웅이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라슈완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등 메이저 대회 금메달은 없이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 1개, 세계선수권 은메달 2개를 따내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시상식에서도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야마시타가 다리가 아파 시상대에 오르지 못 하자 라슈완이 부축해서 맨 윗자리까지 올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금메달은 놓쳤지만 라슈완은 이후 값진 상으로 보상받았습니다. 유네스코와 국제페어플레이위원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고 국제유도연맹도 메이저 대회 우승 경력이 없는 라슈완을 이례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습니다. 그 이유는 "라슈완은 명예(honour)와 존중(respect), 진실성(integrity)이라는 유도의 핵심 가치를 실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