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낸 별명 또는 수식어가 그 인물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맞는 경우, 해당 수식어는 상당한 힘을 낸다. 대상 인물을 단순하고도 부정적인 프레임에 가두어 버린다.
트럼프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슬리피 조(Sleepy Joe)'라고 부른 것이 대표적이다. 늙어서 기력이 떨어진 바이든을 대중은 진작부터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닉네임은 바이든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트럼프는 자신의 사법 리스크가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바이든을 '부정부패 조(Crooked Joe)'라고 불렀다. 바이든 스스로 아들 헌터 문제 등 구린 구석이 많으면서 법무부와 검찰, 언론을 동원해 자신을 탄압한다는 주장을 'crooked'라는 한 단어에 담은 것이다. 이 닉네임은 적어도 바이든을 좋아하지 않는-그리고 민주당계 검사들이 트럼프를 무리하게 기소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에게는 제법 잘 먹혔고, 트럼프는 이 단어를 애용했다.
그랬던 트럼프가, 해리스 부통령에게 닉네임을 붙이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 이것저것 던져보면서 뭐가 잘 붙나 보는 중인데, 아직까지는 딱 맞는 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새다. 다른 정적에게 예전에 썼던 단어들을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써보는 경향도 나타난다. 트럼프 눈에 들고 싶은 공화당 인사들도 가세했지만, 몇몇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만 내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오차 범위 이내로 따라잡힌 게 그 증거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해리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시도한 닉네임이나 수식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미리 말하자면, 어질어질할 정도로 많다.)
트럼프는 지난 7월25일 유세에서부터 해리스에 대한 인신공격을 본격화했다. 도가 지나친 표현이나 거짓말도 상당수다. 한 단어짜리 수식어도 있고, 문장 또는 문단으로 된 비난이나 무시, 조롱도 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중이라 아직 표현이 정리되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1) '웃음이 헤픈(laffin')' 카말라
2) '거짓말쟁이(Lyin')' 카말라
3) '아기 처형을 옹호하는 자'
4) 미치광이(lunatic), 급진 좌파(radical left),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검사'
5) 'IQ가 낮은', '돌대X리(Dumb as a Rock)'
6) 사회적 배려 대상자 특별전형?…'DEI Hire'라는 비난의 의미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스카이(SKY) 다니는 대학생을 보고 '공부도 못하는 게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라서 들어온 것'이라고 악담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회적으로 옳지도 않을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표를 깎아 먹는 표현이어서, 공화당 하원의장 마이크 존슨은 소속 의원들에게 "그 표현 좀 쓰지 말라"고 입단속을 하기도 했다. 여러 언론이 트럼프에게 "당신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해리스를 DEI hire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현 써도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트럼프는 "안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엉뚱한 소리를 둘러대며 즉답을 피할 뿐이었다.
7) 외국 정상들의 '장난감(play toy)'
그들이 해리스를 '밟고 다닐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외국 정상들이 해리스를 '도어 매트(door mat)'로 여길 것이라는 의미다. '도어 매트로 여긴다'는 관용 표현은 '상대를 만만하게 보고 제멋대로 굴다, 이용해 먹다'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왜 그런지 내가 직접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포스트는 해리스의 '겉모습(appearance)'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8) 해리스의 이름 엉터리로 발음하기
▶ 영상 링크 : https://x.com/KamalaHarris/status/735197253153914881
해리스는 지난 2020 대선에서 트럼프의 상대 러닝메이트였고, 이번 정부 내내 부통령이었다. 지금도 뉴스만 틀면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일부러 '커마-ㄹ라' 식으로 틀리게 발음한다. 해리스를 덜 미국적으로 보이게 하고, 존재를 무시하고, 그녀의 이름을 '낯설게' 들리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9) "전엔 인도계라더니 언제부터 흑인이야?"
그런데 트럼프는 지난 7월 31일 흑인언론인대회(NABJ) 집단 인터뷰에서, "(해리스가) 인도인이라는 얘기만 하더니 몇 년 전부터 흑인 행세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조사해 봐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흑인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에 대한 통렬한 반박은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에게서 나왔다. 흑인 여성 최초의 백악관 대변인인 장-피에르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선 안 된다며, 당사자만이 자신의 삶과 경험(흑인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도 트럼프의 이 발언에 대한 심층분석기사를 싣고, 뿌리 깊은 인종주의적 태도라고 비판했다. '당신이 무슨 인종인지는 내가 결정해'라는 백인우월주의적 태도의 발로라는 것이다.
트럼프의 '닉네임 붙이기', 효과 있었나
11월 본선의 승패를 실질적으로 결정할 경합주들의 여론조사 결과는 트럼프에게 위험 신호를 울리고 있다. 블룸버그는 모닝컨설트에 의뢰해 7월 24일-28일 사이 해리스 대 트럼프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30일에 발표했는데, 7개 경합주 가운데 6개 주(state)에서 해리스가 약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시간에서는 해리스가 11%포인트나 앞섰고, 애리조나, 위스콘신, 네바다에서는 2%포인트의 우위를 보였다.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2%포인트 앞섰다. 조지아에서는 두 후보가 동률을 기록했다. 바이든이 이 주들 대부분을 트럼프에 내줄 위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트럼프가 해리스에게 비수를 꽂을 '치명적인 한 마디'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해리스가 아직 미국 대중에게 덜 알려진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부통령', '캘리포니아 출신 리버럴'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대통령이 되면 뭘 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인 정책들에 있어 바이든과 뭐가 같고 뭐가 다를지 등등 아직 제대로 그림을 그려 내놓은 바는 없다. 해리스의 개인적인 인생 역정에 대해서도 정치 고관여층이 아니면 여전히 잘 모른다.
트럼프는 왜 인신공격에 목을 맬까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사안에 대한 복잡한 설명보다는 자신들의 화를 풀어주는 간단한 말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조지 오웰이 <1984>와 <동물농장>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복잡한 언어는 생각이 많아지게 하므로, 상대방 진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 그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튼은 다른 층위의 설명을 내놓는다. 트럼프는 철학이 빈곤하고 정책 논쟁을 할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 할 줄 아는 게 인신공격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