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급차 타고 전원되는 환자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진료 현장을 떠나면서 환자들의 신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렸지만, 대다수 전공의들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병원마다 마취과 의사가 부족해 수술을 대거 미루고 외래 환자를 받지 못하는 등 환자의 생명이 위협받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제(22일) 강원도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전날 오전 11시 30분쯤 강원 양양군에서 당뇨를 앓는 60대 A 씨가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괴사가 일어나 119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구급대는 강릉아산병원에 유선으로 진료 가능 여부를 문의했으나, 병원 측은 당시 응급실에 A 씨를 진료할 수 있는 전공의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의 이송을 권유했습니다.
강릉아산병원뿐만 아니라 속초와 강릉지역 병원 모두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은 구급대는 영동권이 아닌 영서권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수 백㎞를 떠돌던 A 씨는 119에 도움을 요청한 지 3시간 30분 만인 오후 3시가 돼서야 겨우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국 종합병원 응급실 대부분은 중증·응급 환자 위주로 축소 운영되고 있습니다.
울산지역에서도 암 수술 후 수시로 입원해 온 환자가 입원하지 못하거나, 항암치료 중 소변줄이 끊어졌는데 의사가 없어 내원하지 못하는 등의 사례가 속출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수술 일정이 미뤄지는 것은 물론, 신규 외래진료 예약을 받지 않은 경우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산대병원은 마취과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는 바람에 하루 평균 90∼100건가량 이뤄지던 수술 건수가 급하지 않은 수술 중심으로 30%가량 줄었습니다.
외래진료도 일부 과의 경우 입원하는 환자를 돌볼 여력이 안 돼 신규 환자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상급종합병원인 부산대병원을 찾는 신규 환자 대부분은 중증 증세를 보여 외래진료가 통상 입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수원 성빈센트병원도 정형외과 등 주요 진료과의 신규 외래 진료 예약을 중단했으며, 일부 수술 일정을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곳곳에서는 이날 의료진들이 인력 배치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경북대병원 응급실은 의료진이 부족해 매주 수·목요일 외과 진료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수술이 미뤄지고 외래 진료 접수가 제한되면서 병원 혼잡도는 낮아졌지만, 안팎의 혼란은 커지고 있습니다.
부산대병원의 경우 입원 환자가 줄어들면서 간병인들도 자리를 비우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입원하는 환자를 돌봤다는 간병인 A 씨는 "수술이 줄어든 데다가 계속 퇴원하는 사람은 있지만 새로 입원하는 사람들은 없는 상태"라며 "보통 일이 바로바로 들어오는데, 당분간은 일거리가 줄어들 것으로 보고 쉬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남대병원 측도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환자들을 받지 못해 환자 수가 크게 줄었다고 전했습니다.
병원 현장에 남은 전문의와 간호사 등 다른 의료진들은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업무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전국 주요 병원에서는 그동안 전공의들이 담당했던 회진과 약 처방, 야간 당직 등을 전문의가 맡아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간호사들도 연장 근무를 하며 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 차질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이 과정에서 불법 의료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보건의료노조 광주전남본부는 광주지역 대학병원 소속 간호사들이 전날부터 의사 면허를 소지해야 할 수 있는 의료 업무에 투입됐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현행법상 처방, 동맥혈 채혈, 심전도검사 등 의료 행위는 의사 면허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을 해당 업무에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또 의사를 대신해 간호사들이 전산상에 처방 내용을 입력하는 사례도 확인되면서 병원들은 진위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상급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한 환자들이 하급병원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하급병원도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날 270여 병상을 갖춘 2차 의료기관인 광주 광산구 한 종합병원에는 진료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내원객들의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전날에는 하루 평균 200여 명이던 내원객이 두 배가량 늘기도 했다고 이 병원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다행히 아직 환자가 한꺼번에 몰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없었으나, 상급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한 환자들이 언제든지 몰려들 수 있다는 우려로 병원 측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에도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 대부분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복귀하지 않았고, 출근했더라도 실질적인 의료 행위를 멈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부의 강한 압박에도 의료계 반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북의사회 소속 의사 100여 명과 전북대·원광대 의과대 학생 150여 명은 이날 전주종합경기장에 모여 "의대정원 졸속 확대는 의료 체계 붕괴를 부른다"며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엄철 전북도의사회 의장은 "5년 전에 남원 서남대 의대는 교수를 확보하지 못해 폐교했다"며 "현실이 이러한데 갑자기 의과대 학생이 2천 명 늘어난다면 예비 의사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할 것이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강원도의사회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의대 정원 증원 정책과 필수 의료정책 패키지 등 의료 정책의 재검토와 수정을 정부와 관련 기관에 촉구한다"며 "의료 서비스의 질과 안전을 보장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의료 서비스 제공자들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지원을 제공해야 하고, 필수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근무 환경과 복지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부산대 의과대학 등은 20일부터 동맹휴학과 수업 및 실습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산대 비상시국 정책대응위원회는 성명서를 내고 "현 정책이 강행된다면 미래의 대한민국 의료는 필연적으로 붕괴를 맞이할 것"이라며 "의료와 의료 교육에 대한 이해와 근거 없는 현 정부의 정책은 참담하기만 하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