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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미국의 전쟁 중독에 대한 솔직한 고찰

By 마크 한나 (뉴욕타임스 칼럼)

뉴스페퍼민트
*마크 한나는 유라시아그룹 재단(Eurasia Group Foundation) 선임연구원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연구한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국이 현재 맞닥뜨린 지정학적 도전을 설명하는 데 철 지난 사고방식에 기댄 틀이 그대로 쓰이곤 한다. 나머지 등장인물을 아무리 바꿔봤자, 경직된 구닥다리 세계관 안에서 이 세상의 주인공인 미국에 기대되는 역할은 늘 같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냉전적 사고와 세계관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주장이 먹히면서 냉전적 사고는 더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냉전 시대 주적(主敵)이던 소련은 신냉전 시대에 중국으로 대체됐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중국 인민군의 전력은 미국보다 먼저 우주선을 쏘아 올렸던 스푸트니크 충격에 비견되곤 한다. 냉전 시대 미국에는 이름부터 불길하기 짝이 없는 현존위험위원회(CPD, 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라는 조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가려내고 예방하는 조직이었는데, 이 조직이 부활했다. 잠정적인 최대 위협은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다.

러시아에 침략당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미군이 비축해 둔 무기가 줄어들자, 다시 한번 미국이 “자유 진영의 무기고가 되어 민주주의와 자유의 질서를 수호하는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전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신냉전 구도에 들어맞는 ‘적국의 수괴’ 역할을 했다. 소련 정보국 KGB 요원 출신에 목표를 위해 무자비한 결정을 거침없이 내리는 모습은 ‘악의 제국’ 소련의 지도자를 연상케 했다.

미국이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 벌인 지난 세기의 전쟁과 위대한 승리의 기억을 불러오는 게 유용할 때가 있다. 미국 사회가 모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으며, 정의의 사도가 되어 악을 무찌르는 싸움을 이끌던 때 마침 역동적인 미국 경제도 눈부신 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과거를 단순히 도식화하면 잇단 전쟁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자칫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알맹이를 쏙 뺀 기억은 본질을 놓치고 있어서도 문제지만, 현재에 섣불리 적용할 때 특히 위험하다. 전쟁은 종종 미국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겪는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해결책 또는 돌파구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즉 전쟁은 미국에 수많은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일으킨 원흉에 가깝다.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늘 본능적으로 호전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그 결과 전 세계 곳곳에서 긴장이 고조됐고, 미국의 전쟁 중독은 더 심해졌다. 바이든 정권 들어서도 대만 해협에서, 또 중국이 보냈다는 정찰 풍선 때문에 긴장은 계속 높아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곧 1년이 되지만, 이 전쟁이 끝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군사 원조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걸 본인 스스로 잘 알면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틈만 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옮긴이: 칼럼이 게재된 뒤 바이든 대통령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직접 방문해 푸틴과의 전쟁에서 절대 지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중국을 향해서도 전임 트럼프 대통령보다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중국을 압도하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드러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지부진하던 아프가니스탄 재건 계획에서 아예 손을 떼면서 ‘미국이 패배한 전쟁’ 이미지를 단숨에 지워버렸다.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신경 써야 할 지정학적 문제가 이렇게나 많은 가운데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중국과의 신냉전을 대비하자는 의견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들은 러시아와 벌이는 사실상의 대리전에서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기는 동시에 이란도 더 궁지로 몰아넣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원칙에 따라 지구의 질서를 지키는 “세계 경찰” 역할을 기꺼이 하겠다는 데는 많은 미국인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바로 전쟁은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또 전쟁 만한 것이 없다는 가정이다. 이 또한, 실은 더는 통하지 않는 얘기다. 전시 군수산업이 경제 전체를 견인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 요즘의 전쟁은 국가 전체가 전시 체제로 전환해 온 국민을 동원하고 특별세와 전시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 돈으로 치르지 않는다. 대신 외국 정부나 금융 기관에서 돈을 빌려 자금을 댈 수 있는 선에서, 전투도 전면전보다는 소규모 전투 위주로 전쟁을 치른다. 심지어 용병을 고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애국심을 고취하기도 쉽지 않다. 실제로 미국이 최근 들어 벌인 군사 작전은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30조 달러 넘는 막대한 부채만 남겼다. 이는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효과적인 트집거리를 줬을 뿐이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부시 행정부에서 중동 정책을 총괄했고,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강경 기조를 밀어붙이는 데 앞장섰던 엘리엇 에이브람스는 지금이야말로 “신냉전이 준 기회”라며, 미국이 외부의 적에 맞서 초당적인 협력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적을 불문하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는 건 분명 멋진 일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모두가 합심해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그런다고 경제가 살아나거나 나라가 번성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지정학적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전쟁 몰이에 제동을 거는 반대 의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논의를 거쳐 의견을 모으는 통합과 반대 의견을 묵살한 획일적인 의견 일치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다원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다. 민주주의는 그 원칙과 가치를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상향식 시스템이다. 지도자의 말이 곧 법이 되는 하향식 권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쟁이 온 국민을 똘똘 뭉치게 한다는 이야기도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과 다르다. 퓰리처상을 받은 그렉 그렌딘의 책 “ 신화의 종말”에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전투를 벌일 때 남부와 북부 출신 군인들을 같은 부대에 편성해 서부 전선으로 보낸 이야기가 나온다.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투는 남북이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자연스럽게 화합하고 미국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기존의 설명이다. 전쟁으로 분열된 남과 북을 잇는 일종의 “재활 프로그램”이었던 거다. 19세기말 스페인과 벌인 전쟁도, 이어 20세기 초의 1차 세계대전도 성조기 깃발 아래 싸우면서 미국이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방금 언급한 그 어떤 전쟁도 남북전쟁과 이후 짐 크로(Jim Crow) 시대로 이어진 남부의 여전한 인종차별과 그로 인한 갈등, 분열을 봉합하지 못했다. 남부군을 이끈 장군들의 동상 철거 문제나 남부군 깃발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계기였을까?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기 위해 벌인 냉전 시대의 경쟁이 국가의 단합과 기술 발전을 이끌어냈나? 과거를 아름답게 그리는 말들이 전부 다 틀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미화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한 건 자유 진영을 구하려는 고상한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전쟁을 거치며 경제 전반의 산업화에 속도가 붙었지만, 동시에 많은 미국인이 가난해진 것도 사실이다. 냉전 시대에 미국이 내부적으로는 단합이 잘 됐다는 이야기들은 엄연히 존재하던 인종차별이나 적색 공포와 같은 부조리를 오롯이 담지 못한다. 9.11 테러가 미국 사회를 또다시 뭉치게 했다는 설명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미국 사회의 내부적인 분열을 생각해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국가 안보나 군사력의 우위에 관한 잘못된 통념과 신화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가 번영하고 정치적으로도 원만한 타협이 일어난 시절을 보고 싶다면, 1990년대에 주목해 보자.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주요 분쟁에 마구 끼어들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세계 경찰이 되는 것보다 무역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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