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스프] 앤서니 파우치: 다음 세대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우치 소장은 이번 달 국립보건원을 떠난다.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이자, 바이든 대통령의 수석 의료자문관이다.
 
사실 나는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는 진부한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50년 넘게 일한 국립보건원(NIH,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을 떠나며 드는 소회는 정확히 저 진부한 표현 그대로다. 여기서 보낸 시간과 경험을 통해 얻은 수많은 교훈이 다음 세대 과학자, 보건의료 전문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예기치 못한 공중보건상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으며, 그때 가서 풀어본 적 없는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건 결국 다음 세대 과학자와 보건의료 전문가들이다.

어느덧 81세가 된 지금 이 순간도 나는 1968년 6월, 국립보건원 건물로 향하던 첫 출근길을 생생히 기억한다. 번잡한 뉴욕시에서 갓 수련의 과정을 마친 27세 혈기 왕성한 젊은 의사인 내게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 있는 국립보건원 캠퍼스는 한적해 보였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열심히 의술을 연마해 뛰어난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뿐이었다.

젊은 의사들이 으레 그렇듯 내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치료를 받게 해 주고픈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이런 사명감은 지금도 나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다만 그때는 예기치 못한 환경과 상황이 나의 경력과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내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즉 세상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오늘 공유하는 이야기는 과학과 과학적 발견을 사랑한 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더 많은 젊은 인재가 이 글을 읽고 영감을 받아 보건의료 분야에 뛰어들고, 어떤 예기치 못한 도전에 직면하더라도 계속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힘을 받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1962년 의과대학 1학년생 앤서니 파우치. 사진 제공=앤서니 파우치사람의 면역 체계와 전염병의 관계를 연구하는 면역학은 내가 수련의 과정을 밟던 시절 소위 "뜨는 분야"였다. 나는 이 신생 연구 분야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의사로서 나는 흔한 질병을 앓는 이든 난해한 전염병에 걸린 이든 모든 환자를 소중히 대하려 노력했다. 그러려면 의사와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질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예방하며, 치료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도구를 더 잘 갖추고 있어야 했다.

국립보건원 산하 알레르기 감염병 연구소에서의 펠로우십 과정은 나의 여러 관심사에 꼭 맞는 일이었다. 나는 펠로우십 과정을 거치며 인간의 세포를 포함한 여러 조직, 기관이 전염병에 맞서 우리 몸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더 많이 배우고 이해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국립보건원의 훌륭한 전통을 직접 몸에 익힌 연구자이자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 전통이란 "bench-to-bedside"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실험실과 병실 침상을 오가는" 연구와 치료의 유기적인 연계를 뜻한다. 즉 실험실에서 발견하고 검증한 사실을 환자를 치료하는 데 접목해보고, 그 치료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다시 실험에 추가함으로써 연구 성과를 개선하고 가다듬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과학적 연구와 실험에 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과학적 연구가 가진 잠재력에 매료됐다. 훌륭한 과학적 발견은 내 환자뿐 아니라 나와 일면식도 없는 이 세상의 수많은 환자, 또 그들의 치료를 맡았지만 훨씬 열악한 상황에 힘겨워할 (마찬가지로 얼굴은 모르는) 동료 의사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대신 과학적 연구에 빠지면 빠질수록 의사로서 환자를 직접 보는 데 주력하려던 나의 원래 계획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두 가지를 병행하는 길을 찾아냈다. 전염병과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는 동시에 국립보건원 병원에 온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렇게 들어간 국립보건원에서의 시간이 어느덧 50년 넘게 흘렀다.

1985년 에이즈와 관련해 발표하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 박사. 사진=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실험실에서, 또 환자들이 찾는 병원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란 무궁무진하다. 별로 기대할 게 없어 보이는 상황, 순간에 놀라운 발견이 이뤄질 때도 있다. 국립보건원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시절, 나는 혈관염 증후군이라 불리는 치사율 높은 혈관 질병에 효과가 큰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게 됐다.

내가 개발한 치료 방법 덕분에 그전에는 혈관염 증후군으로 죽을 수도 있던 환자들이 차도를 보이고 훨씬 오래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미래는 비정상적인 면역 반응과 면역 체계 전반을 연구하고 관련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으로 정해진 듯했다.

그러던 1981년 여름, 수많은 의료진과 연구자들은 급속도로 퍼지는 불가사의한 질병에 주목하게 된다. 이 병이 불가사의한 이유는 감염된 환자 대부분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남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성애자 남성이 성관계를 했을 때 감염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이 특이한 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후천성 면역결핍증(H.I.V.) 또는 에이즈(AID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병이었다.

에이즈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증상은 우리 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작동해야 할 면역 체계의 세포들이 파괴되거나 손상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연구를 하면서 나는 특히 젊은 동성애자 남성들의 아픔에 강력히 공감하게 됐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인 낙인과 차별, 배제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에 생명과 건강, 꿈까지 송두리째 빼앗기게 생겼다.

1987년 국립보건원에서 에이즈 환자를 회진 중인 파우치 박사와 동료 의료진들. 사진=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에이즈 연구를 계기로 나는 내 연구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틀었다. 유망한 의사의 길을 마다하기로 한 결정에 친구와 멘토들은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에이즈 연구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국립보건원 부속 병원에 에이즈로 입원해 있는 젊은 남성 환자들을 돌봤고, 병원에 머문 시간을 빼고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이 새로운 질병의 원인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밤낮으로 연구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40여 년을 그렇게 환자를 보고 연구하며 살아왔다.

원래 나는 행정적인 업무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관료가 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의사이자 임상 연구자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에이즈 연구에 뛰어들었을 때 이 질병과 연구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인 지원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고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 소장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제의를 수락했다. 하나는 소장이 된 뒤에도 계속해서 내 환자를 직접 돌보는 것, 다른 하나는 연구소에서 내 실험실을 관장하고 이끄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내가 하는 일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이후 내게는 전에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의학과 전 세계 공중 보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기회가 주어진다.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으로 재직한 지난 38년간 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시작으로 총 일곱 명의 대통령에게 감염병 대책과 연구 지원 등에 관해 직접 조언하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는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 조류독감, 탄저균 공격, 2009년 팬데믹 독감, 에볼라, 지카, 코로나19 바이러스 등 공중보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대통령과 대책을 논의하고 감염병 전문가로서 조언했다.

내 전문 분야에 관한 한 나는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에게 언제나 과학적으로 검증된 진실만을 말했다. 때로 이 진실은 그 자체로 불편하거나 정치적으로 대통령과 현 정부에 별로 득이 될 게 없었다. 그래도 과학과 정치가 협업할 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과학적 진실을 통해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1996년 파우치 박사가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에게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1990년대 중반 후천성 면역결핍증에 잘 듣는 항바이러스제가 약효와 안전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가 지원한 여러 연구는 항바이러스제 개발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 이 약은 1996년 미국에서 승인돼 판매가 시작됐다.

21세기 들어 약을 처방받고 복용할 수 있는 에이즈 환자들의 기대 수명은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을 비롯해 저개발 국가에 사는 저소득층에게 이 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행정부의 지시에 따라 전 세계 빈곤 국가에 에이즈 치료제와 항바이러스제를 보급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특히 에이즈 유병률이 높은 지역 가운데 정부가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자원이 부족해 항바이러스제, 치료제를 구할 수 없는 나라가 대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낙후된 보건 환경을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닻을 올린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에이즈 퇴치를 위한 대통령 긴급구제책(PEPFAR, President's Emergency Plan for AIDS Relief program)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에서 에이즈 환자 2천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 이런 중요한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일을 맡은 건 일생의 영광이었다. 에이즈 퇴치를 위한 대통령 긴급구제책은 정책결정자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대담한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에이즈를 연구하고 퇴치하기 위해 애쓴 시간이 국립보건원 초ㆍ중기 시절을 수놓은 기억이라면, 말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이다. 사실 이런 팬데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새로운 전염병은 항상 인류를 위협하곤 했다. 그러나 어떤 질병은 문명사회 전반을 뒤바꿔놓기도 하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1918년 인플루엔자 팬데믹(역자 주: 스페인 독감을 뜻한다) 이후 인간이 겪은 최악의 호흡기 질환이었다. 여전히 퇴치했다고 보기 어려운 코로나19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우선 미국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코로나19는 아주 기초적인 임상과학, 생체 의료 분야 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된 계기였다. 코로나19 대책 가운데 성공적이었던 건 대부분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특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백신을 개발, 안전 검증, 임상시험까지 거쳐 대중에 빠르게 보급하는 데 단 1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돌아보면 실패에서 얻어야 하는 다소 괴로운 교훈도 있다. 미국 내에서도, 전 세계적으로도 망가진 공중 보건 시스템이 코로나19 대응에 걸림돌이 됐다. 미국도 우리 사회의 깊은 정치적 분열 탓에 코로나19에 순조롭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공중 보건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마스크 쓰기, 백신 접종 같은 정책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댄 가짜뉴스와 음모론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백신은 안전성과 효과가 충분히 입증됐지만, 이념에 따라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더보러가기 스프 **'보러가기' 버튼이 눌리지 않으면 해당 주소를 주소창에 옮겨 붙여서 보세요.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