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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산지 둔갑' 약재…끝나지 않은 이야기

"언론 보도를 통해 이제는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가 그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보자가 저희 취재진에게 건넨 말입니다. 제보 내용은 '유명 한의사 회사가 광고하는 건강기능식품에 들어가는 약재의 원산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게 골자였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소비되고 있는 유명 건강기능식품의 원산지가 잘못 표기, 혹은 고의적으로 허위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해당 업체가 고의적으로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었는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지난한 취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건강기능식품용 약재 원산지 둔갑 취재 A to Z


제보를 받은 건 지난 6월 초였습니다. '원산지 바꿔치기' 의혹을 받는 업체는 경기 양주시에 위치한 A 약재 전문 유통업체입니다. 국내 농장이나 무역상들한테 건강기능식품에 들어가는 약재를 떼와 추출용 진액 만드는 제조업체들에게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A 업체가 납품하는 제조업체 중엔 유명 한의사가 홍보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곳도 포함돼있었습니다.  C 유명 한의사 회사가 OEM 방식으로 B 제조업체에 위탁 생산을 맡겼는데, B 제조업체가 A 업체로부터 약재 원물을 납품 받고 있었던 것이죠.  

제보자는 A 업체가 B 제조업체에도 수차례 원산지를 속여 납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국산으로 표기돼 납품 되지만 사실은 중국산과 국산을 섞은 약재다", "심지어 100퍼센트 중국산만 들어간 약재도 있다"면서요. 문제 제기는 명료하지만, 이 의혹을 입증해내기 위해선 A부터 Z까지 치밀한 취재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단순하게 업체 입장을 듣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 골든타임
A업체가 1년 동안 납품한 업체는 최소 100곳이 넘었습니다. 물론 모든 곳에 속여서 납품하고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일부 업체에만 몰래 섞어 납품한다는 건데, 단서를 잡아내기 위해선 '타이밍'이 중요했습니다. 발주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국산과 수입산을 몰래 섞는 작업을 순간 포착해내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정상 작업 후 납품하는 걸 잡아내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보자와 틈틈이 소통하며 이 '골든타임'이 언제일까 고민했습니다.

<승> 증거 확보를 위한 밑거름
포착했더라도 그 다음이 중요했습니다. 육안으로 약재의 원산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 전문 기관에 문의했지만 데이터 부족 등으로 원산지 유전자 분석이 어렵단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방안이 단속 경험이 많고 수사 권한을 갖고 있는 농림부 농산물품질관리원 특별사법경찰관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를 목적으로 한 자체 시험 연구소도 산하에 있을 뿐 아니라, 거래내역 등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 현장을 가다

한약재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대망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7월 4일 오전. 유명 한의사 C브랜드 회사가 OEM 방식으로 생산을 위탁한 B제조업체에 100% 국산으로 나가야할 천궁과 당귀에 중국산이 섞어서 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A유통업체가 이때 납품될 약재를 이른바 '원산지 포대갈이'를 하는 영상도 미리 확보했습니다. 영상엔 작업자들이 made in china라 쓰인 포대에서 나온 천궁과 국산 천궁미를 섞어 새로운 주황색 포대에 담는 정황이 담겨있습니다. (참고: 8뉴스) 예상대로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납품된 약재는 발주서에 나와 있는 목록과 일치했고 '포대갈이' 영상에 나왔던 포대들도 고스란히 확인됐습니다.

<결> 아직 맺지 못한 이야기
현재 특사경은 A업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4일) A업체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취재진이 처음 A업체에 입장을 물었을 땐, '포대갈이'를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SBS 취재가 들어가자마자, 업체는 제보자를 색출하기 위해 직원들의 휴대전화를 검사했습니다. 또 저희가 확보한 자료들 중엔 직원들끼리 '우리도 처벌 받는 것이 아니냐. 사장님이 직원은 죄 없다 해주지 않을까' 등 걱정이 담긴 토로도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A업체 대표가 주장한 청렴, 결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원산지 감별은 하늘의 별 따기


한약재


사실 한약재의 원산지를 판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생산지가 어디든 품종이 같으면 육안 구분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최고야 한국한의학연구원 박사는 "대부분의 한약재는 중국과 우리나라 품종이 동일하기 때문에 육안이나 유전자 비교로 원산지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최근 첨단 기법으로 방사성 동위원소 비율을 분석해 원산지를 구별하는 방법도 고안되었지만, 전세계 토양시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근시일 내에 실용화되기는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아예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이나 농림부 소속 시험연구소 등에선 이화학 검사로 원산지 감별을 하고있습니다. 하지만 원산지가 비교적 잘 판별 되는 쌀이나 한우 등과 달리, 한약재는 '검증 불가'로 뜨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위생 엉망이어도 멀쩡히 유통…'관리 사각지대'


건강식품용 도라지에서 쥐사체 발견


제보 중엔 위생 불량 상태의 약재들도 버젓이 유통되고 있단 내용도 있었습니다. 약재에 쥐 사체부터 담배꽁초 등 이물질들이 발견되는데 골라내는 과정만 거치고 그대로 유통된다는 겁니다.
 
취재해보니, 원산지든 위생이든 관리가 안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히 한의원 등 의료기관에 납품되는 의약품용 한약재보다 식약공용 한약재(식품용)의 경우엔 더 구멍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유통 과정에서 관리 감독 수준의 차이 때문입니다. 수입산의 경우 통관 단계에서 의약품용, 식약공용 약재 모두 관능검사, 위해물질검사 등을 거칩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다릅니다. 의약품용 약재는 유통 전 제약회사 등에서 약전에 따른 시험검사를 의무적으로 두 번 더 거치는 것과 달리, 식약공용 약재는 민간에 자율적으로 관리를 맡기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경진 경희대 한의과학대 교수는 "사실상 식약처의 단속 공무원이 적다보니, 수입하는 약재들을 일일이 단속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식약처가 손 놓고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년 정기 단속 계획을 세워 불시에 업체에 찾아가기도 하고, 영업장을 대상으로 위생관리 교육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제보가 들어온다는 건 이런 노력들이 닿지 않는 곳들이 있다는 증거겠죠.
 

피해는 어디까지?


B제조업체는 '원산지 바꿔치기 의혹'을 몰랐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납품받을 때 따로 원산지 감별 등 검증 단계를 거치지는 않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따로 검증하진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C브랜드 역시 방문해 물어봤지만, "우리는 레시피만 설계할 뿐 제조는 OEM 방식으로 전적으로 맡기기 때문에 원물 납품 단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른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피해를 본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은 유명 한의사의 이름을 믿고 구매했을 수도 있고, 성분과 원산지를 따져 제품을 골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사 브랜드와 제조업체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망행위가 있었고, 누구까지 피해자라고 봐야하는 걸까요?
 

침묵을 낳는 폐쇄적인 산업 구조


이번 취재를 계기로 만났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식품용 약재 산업의 폐쇄성을 지적했습니다. 이경진 교수는 "식약처가 한 업체에 단속을 나가는 순간, 업계에 단속 떴다는 사실이 다 알려진다"며 단속의 어려움을 말했습니다. 또 이들 업체는 내부적으로도 침묵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놓고 "중국산과 국산을 섞어라"는 식의 지시를 하지 않고, 적발을 피하기 위해 직원들 단속은 물론, 메신저 자료 등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미약한 처벌 수준도 문제로 꼽힙니다. 위생 불량이 적발됐더라도 처벌이 최대 영업정지 3개월에 불과합니다. 이 교수는 "형사 처벌되는 경우가 사실 거의 없다보니 단속 걸리면 조금 쉬면된다는 생각을 갖거나 회사명이나 대표자 이름을 바꿔서 그대로 영업하는 경우가 있다"며 처벌 강화 필요성도 지적했습니다.
 

기만이 '기망행위'로 입증 될 때까지


취재 과정에서 확보한 영상과 사진, 녹취 등 자료를 보면, 원산지 둔갑과 위생불량, 무자료 거래 정황까지 소비자 기만 행위의 정황은 뚜렷해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내부고발자의 용기 없이 드러나기 어렵고, 고발을 했다고 해도 법적 처벌 가능한 '기망 행위'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당국이 조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제보자가 요청한 '소비자 기만행위 중단'이 가능하려면 제도적 개선이 우선되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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