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분인데 왜 언니들 대표에요?"
처음 명함 교환을 하면 항상 듣는 질문입니다. 이 칼럼의 독자 여러분들 중에서도 간혹 댓글 남겨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자인 줄 알았는데 하단의 사진 보고 놀랐다'는 내용이죠. 단체의 대표를 맡은 8년 동안, 질문에 답을 하려면 뭔가 설명이 길어지곤 했는데요. 요즘은 명쾌하게 한마디로 정리가 됩니다.
"일종의 부캐에요, 부캐. 린다G 같은 거요."
부캐란 간단히 말해서 '본체(원래의 자기)와 조금 다른, 재창조된 캐릭터'입니다. 요즈음 방송계에서는 한참 유행이지요.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의 린다G는 이효리의 부캐입니다. 미국 전역에 미용실 프랜차이즈를 가진 부유한 교포라는 컨셉으로, (본체라면 다소 조심스러울) 돈 얘기도 거침없이 해버립니다. 또한 가수 비의 부캐인 비룡은 막내라서 언제나 형, 누나에게 몰이를 당하면 발끈해서 집에 간다고 하거나 그만하고 싶다고 울기도 하지요. 월드 스타라는 이유로 점잖은 모습을 보이던 그는, 부캐로 지내는 동안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이렇듯 부캐는 '나이지만 내가 아닌 존재'입니다. 저에게는 단체명과 '좀놀아본언니'라는 닉네임이 그렇지요. 사실 이 부캐는 아주 우연히 만들어진 것인데요. 20대 후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던 제가 치유 목적으로 투병기를 쓰고, 블로그에 올리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나의 신상을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익명으로 올리던 것을, 방문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블로그 주인은 신상정보가 없네? 어떤 사람일까? 미대를 졸업? 패션회사 출신? 흡연자? 왠지 30대 초반의 세련되지만 좀 센 여성일 것 같아."라고요. 그 오해를 굳이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 그것이 이 '여성형 부캐'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한 이유 중 대부분은 위에 말한 힌트 때문이었지만, 문체를 보고도 여성일 거라 확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면 저는 더욱 여성적입니다. 말투도, 제스처도 다소 '언니'같은 느낌이 있지요. 어릴 때부터 약 11년 동안 이 기질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습니다. 학우들이 제 머리채를 잡거나 침을 뱉기도 했지요. 그런 만큼 '숨기고, 가려야 하며, 드러나면 절대 안 되는' 단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며 몸을 키우고, 무시당하지 않게 명문대를 진학하고, 대기업을 입사하면서 남들보다 우월한 모습은 더 많이, 부끄러운 자아는 철저히 숨기며 20대를 보냅니다. 슬프게도 그 결과는 우울증과 자살 시도였지요.
하지만 이 부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제 삶에는 큰 변화가 생겨납니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 경청하고 공감하는 '상담'이라는 영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역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놀 만큼 놀아본,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중심을 잡은 (비록 실제로는 이성이지만) 동성의 언니에게 털어놓고 상담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많은 청년들에게 제 부캐는 꽤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하루에도 100통 이상씩 메일이 쏟아졌거든요.
그렇게 많은 청년들과 만나 서로 고민을 나누고, 얼마를 내면 되냐는 질문에 "얘, 언니 동생끼리 수다 떠는 건데 무슨 돈을 받니?"라고 답하다 보니 무료상담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고, 그것이 비영리단체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숨기고픈 모습이 오히려 삶의 방향을 찾아준 나침반이 된 셈이지요. 개인적인 인간관계도 드라마틱하게 달라졌고요.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며 '누구나 친해지고픈 존재'가 되려고 애썼을 때 보다, 대단한 직함도 없고, 방정맞으며 수다스러운 비영리 활동가인 지금의 모습을 사람들은 더욱 사랑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위축되지 않고, "맞아요, 저 좀 여성성이 있죠? 많이 들어요."라는 자기 개방을, 사람들은 훨씬 반갑게 맞이해 주더라고요.
그 이유가 뭘까, 제 스스로도 궁금했는데요. [인-잇]의 동료 필진이기도 한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쓴 글귀가 답의 힌트가 되었습니다.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도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시진 않나요? 그 해결책을 '완벽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진 않나요? 단점이라 생각하는 모습을 숨기기 급급하면서요.
그런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완전히 달라진 내가 아닌, 불완전한 나를 건강히 드러낼 수 있는 부캐의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숨기고픈 나를 부캐에 담아 당당히 드러내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존재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진 않을까요?
(디자인 : 장동비)
#인-잇 #인잇 #장재열 #러닝머신세대
# 본 글과 함께 읽어볼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뒷광고, 모두를 속인 유튜브 속 트루먼쇼
[인-잇] 시장님, 의원님, 청년이 미래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