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영 금지작 '황무지'(1988년/미개봉)
다큐멘터리 PD 출신인 김태영 감독이 연출한 작품입니다. 1987년 영화 '칸트 씨의 발표회'와 이어지는 연작입니다. 칸트 씨의 발표회는 시민군의 고통을, 황무지는 진압군의 양심적 가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첫해인 1988년 상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보안사 등에 의해 금지당했습니다. 상영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결정적 장면은 바로 아래 장면입니다.
김태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지금도 어딘가엔 주인공 같은 진압군 출신이 있을 겁니다. 죄 없는 시민들을 숨지게 한 고통이 상당하겠죠. 뒤늦게 개봉되는 제 영화에서처럼 지금이라도 이런 분들이 나와 속죄의 양심선언을 하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일본 다큐멘터리 '자유광주'(국내 상영 금지)
5·18 1년 뒤인 1981년 일본 판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씨 등이 공동 제작한 작품입니다. 도미야마 작가는 1921년 일본 고베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구 만주와 하얼빈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모습을 목격한 뒤 평생 일본의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도미야마 작가는 진압군을 '고릴라 병사'로 표현했습니다.
마나베 유코 도쿄대 교수는 SBS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18 당시 아사히 신문의 본사 기자가 독일 기자 힌츠페터 씨처럼 택시 운전사를 고용해 광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 24일 이후 아사히 지면에 르포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당시 일본 시민사회는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1974년 김지하 시인 사형 선고 등으로 '김대중을 구하자' '김지하를 구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인권을 위해 한국 쪽과 연계하자는 운동도 있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어진 민주화 투쟁이었고, 한국 한 나라뿐 아니라 필리핀 등 다른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 동에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 군사정부 탄압에 살아남은 '오! 꿈의 나라'
대학가 영화동아리 출신들이 만든 영화사 '장사곶매'의 작품입니다. 1989년 소극장 상영 이후 노태우 정부는 필름을 빼앗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영장이 기각되면서 개봉이 가능했습니다. 시민군 출신인 주인공이 광주 지역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칠판에 '5월 15일'이라고 쓰여 있군요. 야학에서 구두닦이 학생이 질문합니다. "민주주의 좋다는데, 저는 데모 때문에 못 살겠어라…손님이 없어져서…."
이 영화에선 이런 대사도 나옵니다. "미친놈들, 민주주의가 되면 공돌이가 사장이라도 될 줄 알았나 보지? 그저 우리나라는 박정희 같은 사람이 꽉 잡고 있어야 돼요" 1989년 영화 대사인데, 혹시 2020년에도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1991년 제작된 '부활의 노래'는 당시 "무장봉기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민주화 운동 부분 25분을 잘라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정국 감독(1997년 '편지' 연출)은 SBS와의 전화 통화에서 "영화의 4분의 1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국회의원들 찾아다니면서 많이 부탁을 했다. 결국 삭제 부분이 4, 5분 정도로 줄었지만, 그것도 영화의 핵심 부분이었다. 그걸로 1991년 3월 개봉을 한 것이다. 이후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중에 삭제 부분을 되살려서 재개봉했는데, 이것으로 1994년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힘든 시기였고, 영화를 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어 저승에 갈지라도 우리들의 넋은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겁니다. 이건 결코 광주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