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어느 전쟁의 희생자 수를 연상시키는 이 통계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가습기살균제 사태 피해자의 총합이다. (2018.3.18. 환경부) 2011년 가습기살균제 독성이 처음 보고되고 피해자 집계가 시작된 뒤 약 7년 동안, 목숨을 잃거나 병을 얻게 된 이들의 수는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혹자는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남긴 사고라고 일컫는다.
그동안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남겼다. 오랜 기간 국가는 사실상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고, 기업은 발뺌하거나 심지어 보고서를 조작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교수와 전문가들은 뒷돈을 받고 기업에 유리한 보고서를 써준 혐의로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그 사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장해를 입었고 누군가는 가족의 병수발을 하느라 빚더미에 내몰렸다. 요컨대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상징적이다. 거의 모든 대형 사건사고가 그렇듯이, 우리 사회의 부실하고 일그러진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간이 흘러 환경부는 지난 13일, 가습기살균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살생물제관리법'을 내년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살균제나 소독제, 방충제 같은 살생물제품과 살생물질은 안전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사전 승인을 거쳐 시장에 유통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기존 법체계에서는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유해물질을 기업이 수입·제조해 유통하더라도 딱히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지난해 8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시행됐지만 사고의 재발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 법으로 제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태가 불거진 이후 7년 만에 재발방지책이 마련된 셈이다.
[2018.03.13 8뉴스 관련기사] ▶ '가습기 살균제' 피해 7년…사전승인제 내년부터 시행
● 까다로워지는 화학물질 관리…"검증없이 유통없다"
![[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7년, 우리에게 남은 것들](http://img.sbs.co.kr/newimg/news/20180318/201161828_1280.jpg)
소비자의 입장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제품 표기 정보의 제한이다. 살생물제품과 안전확인대상 생활화학제품의 경우 '안전한', '친환경', '무독성' 같은 문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또 확실하게 성능이 입증된 살생물제품 외에는 '항균', '세균 제거' 같은 광고도 금지된다.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가습기살균제가 그 유독성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제품으로 버젓이 팔려나갔던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조치다.
나아가 위반 기업에는 강한 과징금도 부과된다. 살생물제관리법을 위반하는 경우 불법제품 판매액에 상당하는 과징금을 물리고 판매액 산정이 곤란한 경우 10억 이내 과징금을 부과한다. 화평법 위반 역시 총 매출액의 5% 혹은 10억 이하 과징금을 물린다. 금전적인 제재를 추가해 사업자의 주의와 책임 의무를 환기하겠다는 취지다. 이전에는 벌칙으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만 부과했다.
● 평생 고통받는 피해자…"피해자 지원 더 신경써야"
![[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7년, 우리에게 남은 것들](http://img.sbs.co.kr/newimg/news/20180318/201161827_1280.jpg)
"많이 답답하죠, 봄바람이 불고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되게 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또 다시 입원을 하게 되니까 아직 무리구나 싶더라고요."
오랜 시간 병과의 싸움에 익숙해진 탓인지 윤 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목에는 폐 이식 수술을 받기 전 기관 삽관으로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집에 두고 온 두 아이가 눈에 자꾸 밟힌다고 했다. 새로 시행되는 살생물제관리법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너무 당연한 거죠. 사실 벌써 됐어야 하는 거고. 실제로 이건 그냥 인재잖아요. 판매가 되지 않았어야 할 게 판매가 됐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인데… 관련법을 마련하라는 얘기가 2013년부터 나왔었다고 하는데 이제서 한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요. 지금이 3월인데,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는 것도 좀 그래요. 이왕 어차피 되는 것 좀 빨리 하면 좋을 텐데."
![[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7년, 우리에게 남은 것들](http://img.sbs.co.kr/newimg/news/20180318/201161825_1280.jpg)
"나라가 국민을 먼저 보호해야 하는데 왜 먼저 나서서 1등급, 2등급 나눠서 차별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옥시 같은 큰 회사들 때문이었는지, 우리나라가 너무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건지… 다들 힘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서 어떻다 저떻다 하는 게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지원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윤 씨는 가끔 "구걸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지원 신청을 했다가도 몇 번을 반려당해 소견서만 대여섯 번을 뗐다. 간병비를 지원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번에 처음 2인실에 입원했기 때문에 입원비가 나올지도 걱정이다. 더 답답한 건 왜 반려되는지, 무엇 때문에 안 되는지 설명조차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윤 씨는 지난 2005년, 두 아이보다 먼저 태어난 큰 딸을 먼저 보냈다. 다른 병으로 입원하게 된 병실에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사용한 이후였다. 병명은 '급성곤란 증후군'과 '패혈증'이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큰 딸은 당시 남아있는 증거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피해보상도 받지 못했다. 병간호를 하느라 병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윤 씨 역시 병을 얻었다.
● '가습기살균제 사태', 현재진행형
![[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7년, 우리에게 남은 것들](http://img.sbs.co.kr/newimg/news/20180318/201161830_1280.jpg)
오랜 과정을 거쳐 정부가 7년 여 만에 정부가 재발방지책을 내놓았지만 사실 이런 제도, 다른 선진국에는 일찌감치 있었다. 미국은 지난 1972년부터, 유럽연합(EU)은 1998년부터 살생물제 관리를 위한 별도의 법률을 제정하여 화학물질 및 제품의 시장 출시 전 안전성 검증을 의무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에 비해선 46년이나 늦은 셈이다. 피해자 윤미애 씨의 말이다.
"진작 조치가 됐으면 그 일이 없었을 수도 있고,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법적 책임을 지는 문제도 사실은 좀 미미하게 흐지부지 끝난 부분도 있고. 피해자들은 피해자들대로 아직도, 여전히 고통 받고 있고…."
대법원은 지난 1월 신현우 전 옥시 대표에게 징역 6년형을 최종 선고했다. 관련법 제·개정도 마무리되는 수순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나아간다. 중요한 건 그 외양간이나마 제대로 고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는 일이다. 이제야 법은 바뀌고, 세상은 지난 일을 과거로 돌리며 조용히 넘어가는데 윤 씨의 목에 남은 수술 상처는 아직 선명했다.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