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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배우 김영애, 고인이 남긴 러브레터

[취재파일] 배우 김영애, 고인이 남긴 러브레터
지난 주말 배우 김영애 씨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몇 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지만, 이후 방송과 영화 출연을 재개하고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부고를 듣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회복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꽤 오랜 시간 아픈 몸으로 연기를 해오셨던 모양입니다.

40대 이하의 시청자 혹은 관객에게 김영애 씨는 아마 '어머니' 역할로 각인된 배우일 겁니다. 때론 인자하고 때론 엄격하고 때론 억척스러운 어머니.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고인의 과거 출연작들을 다시 살펴보다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자주 연기했던 이 배우의 얼굴이 사실은 매우 도회적이고 세련됐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극을 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잘 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고인의 과거 인터뷰 영상을 돌려보다 또 한번 놀랐던 건 그 안에 담긴, 연기에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투병생활 중에도 작품활동을 중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촬영에 나섰던 것도, 마지막에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외출증을 끊어가며 연기에 임했던 것도,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구나 이해가 됐습니다. 연기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배우였던 거죠.
2014년 SBS 인터뷰
"정말 잘 하고 싶어, 난 연기를. 내가 살아가면서 제일 욕심 내는 게 연기를 잘 하고 싶다는 거야.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난 좋은 엄마도 아니고, 좋은 와이프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나마 좀 하는 게 연기인데 이것마저 제대로 안 되면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2014년 SBS 카메라 앞에 선 60대의 배우는 연기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배역에 너무나 몰입해 놀랐다는 후배 연기자의 말에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나는 작품을 할 때는 그게 전부야.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르지. 각자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다 다르니까. 나는 내가 연기자라는 게 너무너무 감사하고 이 직업이 너무 좋아. 그 다른 어떤 것보다 연기가 우선이니까, 연기가 우선 순위 1순위니까,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병마와의 싸움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투병으로 인해 그 마음은 더 절박하고 간절해진 것 같습니다. "건강 때문에 내가 연기를 못 하는 시간이 좀 있었는데, 그때 정말 미치도록 연기가 하고 싶었어. 그 욕구는 그 어떤 것하고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가 이 직업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연기를 못 하던 그 시간에 다시 한번 느꼈어."
2016년 기자간담회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 개봉을 앞두고 열린 지난해 기자간담회 현장에선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연기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나오자 사실은 '연기'가 있어 힘든 투병생활을 버틸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하기로 하고서도 사실은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을까 그랬었어요. 사실 저한테는 굉장히 위기였는데, 그래도 이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몇 달의 고비를 극복했어요. 일단 현장에 나가면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미래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이런 거 잊어버리니까. 카메라 앞에 서는 게 힘들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긴 하지만, 저한테는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자체가 행복이에요."

이런 절절한 사랑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10대의 연인들끼리 주고 받는 얘기도 아니고, 60대의 배우가 연기에 대해 이런 사랑을 고백하다니, 듣는 사람을 뭉클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좋은 아내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좋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큼 간절한 적 없었다는, '인간 김영애'의 삶보다 '배우 김영애'가 언제나 우선이었다는 고백.

화면 속에서 예뻐 보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오래된 동영상 속 고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군요. "젊음이 예쁘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그냥 세월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한동안 촬영 때 계속 거울을 보면서 조명을 찾아 다닌 적이 있었어요. 30대 후반에, 그때쯤 눈 밑에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주인공을 오래 했는데 주인공 병이 있어서 그런지, 그게 초조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내 모습이 창피하더라고. 연기를 잘할 생각을 해야지 외모를 신경 쓰면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겠다 싶었죠."

돌이켜보니 '어머니' 역을 맡으며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배우에게 세상은 연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가졌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심과 질문은 늘 매력적인 배역을 맡은 젊은 남녀 주인공의 몫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부고를 듣고 다시 찾아본 예전의 인터뷰 영상에서 고인의 '연기에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을 듣고 나니 왠지 떠나버린 이가 짝사랑 상대에게 남긴 러브레터를 읽은 듯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러브레터가 고인의 연기를 기억하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남긴 것 같아, 이 글을 통해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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