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 다니엘 튜터가 쓴 <화끈한 음식, 지루한 맥주 (Fiery food, Boring beer)>란 제목의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맥주 애호가들은 ‘맞다! 한국 맥주는 너무 밍밍하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국내 맥주 업체들은 “오해다. 소비자 입맛에 맞춘 것이다.”라고 반박하면서도 맥주의 쓴 맛을 강조한 신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 맥주에 대한 평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맥주 회사들이 2~3년 전부터 페일에일 등 여러 종류를 만들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특색이 없는 밍밍한 ‘라거’ 맥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고 튜터씨는 말했습니다.
● 한국 맥주는 진짜 맛없는 것일까?
대형마트에서 맥주를 사는 사람들에게 맥주 맛을 물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수입 맥주는 맛이 다양하다. 그에 비해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 싱겁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야박한 평가는 한국 맥주가 “원재료를 덜 쓴다. 공법에 문제가 있다.”는 문제 제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논란이 됐던 게 맥주 주원료인 맥아(보리를 발아시킨 후 말린 것)의 함유량입니다. 맥아의 비율에 따라 맥주의 맛과 향기가 달라집니다. 각 나라는 세금 문제 때문에 맥아 함유량이 일정량 이상일 때만 맥주로 분류합니다. 독일은 기준을 100%로 정해놓고 있고, 일본은 66.7%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0% 밖에 안됩니다. 때문에 맥아를 적게 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죠.

그럼 ‘제조상에 다른 점은 없는가’란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해 양조학 전문가인 정철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당연히 맥주 제조사마다 레시피가 다르고, 각자 추구하는 맛이 있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정 교수는 “그 동안 오비와 하이트진로라는 대기업들은 청량감을 강조하는 ‘라거’ 계열의 맥주가 한국 시장에 맞는다고 판단을 해왔다. 전 세계적으로도 라거 계열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업체들은 맥아와 탄산의 농도 등을 조절해 가면서 소비자의 입맛을 맞춰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제조사들은 원가를 절감하면서도 소비자들에게 팔릴 수 있는 맥주를 만든다. 그런데 그 동안 독과점 식으로 맥주 시장이 유지되다 보니, 두 업체는 똑같이 ‘라거’ 계열 맥주만 만들면서 생산 원가를 줄였다. 묵직한 맛의 ‘에일’ 계열 맥주 등 다양한 맥주를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맥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재료 외에 거품도 있고, 유통 과정에서의 신선도 유지도 있는데 그런 부분은 일본 등에 비해 신경을 덜 썼던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국내 맥주 업체들의 연구 개발비 투입 비율이 전체 산업 평균의 6분의 1인 0.4%에 불과하다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도 있었습니다.

크래프트비어(수제맥주) 제조업체 플래티넘의 윤정훈 부사장은 국산 맥주의 맛 논란에 대해 ‘다양성의 부재’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에서 맥주 양조를 전공하고, 현재 전 세계 맥주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 부사장은 “전 세계 맥주의 종류는 정말 다양합니다. 국내 대기업의 ‘라거’ 맥주는 그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만 본다면 국내 대기업 맥주의 맛과 품질은 상위 5등 안에 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을 이들 맥주만으로 맞출 수 있냐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국산 맥주는 다양한 수입 맥주에 급속도로 밀리고 있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전체 시장의 8.4%를 차지한 수입 맥주는 지난해 10% 정도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트와 편의점에서 한 달 기준으로 판매량이 국산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수입 맥주가 ‘4개에 만원, 5개에 만원’ 이런 식으로 공격적으로 판매에 나선 것도 크지만, 해외에서 다양한 맥주를 접하면서 달라진 소비자의 입맛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죠.
비상이 걸린 국내 대기업들은 에일 맥주 등 다양한 맛의 신제품 맥주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습니다. 국내 맥주 제조업체 관계자는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한 두 번 신제품을 먹다가 다시 원래 맥주로 돌아간다. 계속 신제품을 개발하겠지만 주력 판매 제품에 더욱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이미 ‘국산 맥주는 소맥용이다. 예일 맥주 등은 수입 맥주가 맛있다’는 이미지가 굳어버린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 수제 맥주 활성화
2개의 맥주 대기업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편일률적인 상업 맥주의 대안은 바로 수제 맥주입니다. 수제 맥주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생겨났습니다. 정부는 수제 맥주 시장을 키우기 위해 영업장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팔 수 있는 ‘브루펍’ 허가를 내줬습니다. 하지만 매장 내에서만 양조와 판매가 가능하고, 외부 유통은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소규모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 보니 사업을 확장할 수가 없었고, 결국 많은 브루펍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다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됩니다. 만든 매장 뿐 아니라 다른 술집에서도 맥주를 팔 수 있게 하고, 중소 수제 맥주 공장을 설립하는데 기준을 완화했습니다. 이런 규제 완화에 힘입어 많은 수제 맥주 매장이 생겨났고 중소 수제 맥주 공장들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또 중소 수제 맥주 업체들이 성장하려면 소비자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판매하는 게 필요한데 현재는 술집에서만 팔 수가 있다 보니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이런 규제가 없습니다.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미국 맥주 가운데서도 수제 맥주들이 많다고 합니다.
플래티넘의 윤정후 부사장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수제 맥주가 전체 맥주의 12%를 차지하고 있고 일본도 지금 급성장 중인데 2% 정도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0.2~3%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국산 수제 맥주 수출까지 생각한 윤 부사장은 “맥주는 저도주이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술이다. 그런데 국산 맥주 인기는 떨어지고, 수입 맥주가 이렇게 급성장하는 게 정상은 아니다. 수제맥주를 키울 생각이라면 규모 규제는 중소 업체가 생존할 수 있도록 75㎘ 이상 구간을 세분화해 세금 혜택 감소 폭에 차등을 두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술과의 형평성 때문에 눈치를 봐왔던 정부가 결국 규제 개선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정부는 어제 무역투자활성화 회의를 열어 수제맥주가 마트나 편의점에서도 팔 수 있도록 하고, 쓸 수 있는 재료의 제한도 풀어 다양한 맛의 맥주를 만들 수 있게 하기로 했습니다.
● 민감한 세금 문제는 어떻게…
그렇지만 민감한 세금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수입 맥주가 급성장할 수 있던 데는 공격적인 가격 정책도 있는데 이는 세금과 관련이 있습니다.
국산 맥주나 수입 맥주나 주세율은 72%로 같지만 세금을 매기는 기준인 과세표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국산맥주는 원재료비에 노무비, 기타 경비와 제조사 이윤이 포함돼 있어 경비와 이윤이 늘어나면 세금도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반면 수입맥주는 수입신고가에 대해서만 세금이 붙습니다. 때문에 마케팅 비용을 쓰고 이윤을 조정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이에 대해 정철 교수는 “이런 세금 부과 체계는 역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맥주 세금에 대한 전반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세수를 걱정하는 정부는 과세표준과 세율을 조정하는 데는 소극적인 모습입니다. 정부는 4분기에 맥주 산업 활성화 대책을 발표할 계획인데, 과연 어떤 수준까지 규제를 풀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