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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리의 도시가 '건축주들의 도시'가 되지 않으려면

[취재파일] 우리의 도시가 '건축주들의 도시'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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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9월 오후, 나는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 잠깐 낮잠을 자는 양복을 입은 회사원, 함께 식사하는 연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보행자 수십 명을 관찰했다. 이 공간을 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은 보행자들이다. 하지만 보행자들을 유인하고, 보행자들이 발길을 멈추도록 하고, 대리석, 콘크리트, 물, 유리의 공간을 사회적 공간으로 바꾼 것은 디자인이다. -찰스 몽고메리,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도시계획전문가 찰스 몽고메리가 책에서 묘사한 뉴욕 맨해튼 GM빌딩 앞 공원의 풍경입니다. 뉴욕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관광객들의 명소가 된 이 공원은 뉴욕 시가 아닌, GM (제너럴 모터스)이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한 ‘공개공지’입니다. 1961년 미국 뉴욕시는 사유지에 공공광장를 건설하는 부동산 업자에게 건물을 더 높이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GM이 이 법에 따라 건물을 7층 더 올리는 조건으로 빌딩 앞에 '공개공지'를 만들어 개방한 겁니다.

그런데 GM빌딩 앞 공원이 처음부터 명소였던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질 당시 이 공원은 보행로에서 멀리 떨어져있었고 담장으로 둘러쳐져 시민들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었습니다. GM은 건물을 더 높이 올리는 조건으로 공개공지를 조성했으면서도, 사유지에 외부인이 들어오기 어렵게끔 공간을 만든 겁니다. 뉴욕 미드타운과 다운타운 공개공지의 4분의 1을 설계한 한 건축회사 사장은 사회학자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에게 “건축주들로부터 보행자들이 머물지 않고 빨리 빠져나가도록 광장을 설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찰스 몽고메리는 책에서 ‘건축주들은 건물 증축을 허가받는 조건으로 공공 공간을 조성했지만, 이들은 공공 공간을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척하면서 다시 뺏었다.’고 평가합니다.
공개공지
● 철조망에 담장…말로만 '공개'인 서울의 공개공지

시민들에게 공공 공간을 제공하는 척하면서 다시 빼앗는 행태는 2016년 서울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공개공지’ 개념은 1991년 처음 도입됐습니다. 과밀화로 인한 도시 공간 파괴를 늦추기 위해 일정 규모이상의 도심 건축물에 공개공지를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한 겁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마련하면 용적률과 건축물 높이 제한을 완화하는 인센티브도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찾은 서울 시내 대형 주상복합 건물들의 공개공지는 말로만 ‘공개’공지였습니다. 교대역 근처 금싸라기 땅에 지어진 한 주상복합아파트의 공개공지는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곳에 조성돼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용객은 대부분 아파트 입주민들이었습니다. 그나마 계단을 통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철조망과 담장으로 막혀있었습니다. 담장 한가운데 붙어있는 ‘위험’ 표지판은 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였던 강남구 도곡동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담장을 둘러쳐 놔 일반인들이 찾기 어려운 것은 물론, 설령 접근한다 하더라도 무전기를 든 건장한 경비원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기 일쑤였습니다. 서울시 조례로 공개공지에는 안내판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차장 된 공개공지
● 적발돼도 건축주는 '배째라'…당국은 '어쩔 수 없다'

행정당국에 적발돼도 무시하거나, 꼼수를 써서 회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초구 방배동의 한 주상복합건물은 공개공지를 아예 주차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구청이 지난 6월 시정명령을 내렸다는데, 6개월 뒤인 12월 21일 찾아가보니 아직도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공개공지 한구석에는 잠깐 설치해 놨다 철거된 주차 방지용 말뚝과 체인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공개공지 조성을 조건으로 도심에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을 지어놓고도 공개공지를 사적인 정원처럼 사용하는 곳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관리 감독 책임이 있는 서울시와 해당 구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책임을 미루거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상투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공무원들이 소관이 어딘지도 모르고, 현실적으로 관리하기도 어렵다는데, 지난 23일 국토부는 ‘기업 부담을 완화하고 투자를 촉진’한다며 공개공지 조성 시 용적률 완화 인센티브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 우리의 도시가 '건축주들의 도시'가 되지 않으려면  

한때 사유지에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던 뉴욕 GM빌딩의 공개공지가 지금처럼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뉴욕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아만다 버든 (Amanda Burden)이 부임하면서부터입니다. ‘도시는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그녀는 GM빌딩을 비롯한 뉴욕 대규모 건물들의 공개공지를 모든 시민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버든은 보행자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GM빌딩 공개공지 내에 시설물과 조형물들을 배치했고,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적절히 접목해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도시 공간에 공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담당 공무원의 철학과 추진력이 뉴욕의 공개공지들을 진정한 ‘공개’공지로 만들어낸 겁니다.

수십 년 전 뉴욕과 오늘날 서울은 ‘인센티브’라는 시장 원리만으로 도시에 시민 공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공개공지들을 되살리려는 노력 없이 건축주 인센티브만 남발하는 탁상행정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도시는 ‘시민의 도시’가 아닌 ‘건축주들의 도시’가 될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찰스 몽고메리 지음, 윤태경 옮김
공개공지 인센티브 용적률 가치 연구- 서울시 성동구 지식산업센터 사례 (2016), 이성호,이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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