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나 수정으로 만든 광학 부품,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키면 여러 색깔이 나옵니다. 무채색의 빛에 숨어 있다가 프리즘을 거치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동안 정상적인 경제 정책, 기업 활동으로 생각했던 경제의 여러 분야가 최순실 프리즘을 통해 보니까 정상적이지 않은, 숨겨져 있던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원래 프리즘을 통해 나오는 빛은 무지개색으로 아름다운데 최순실 프리즘을 통해 나타난 우리 경제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A. 먼저 신뢰를 잃고 일그러진 경제정책의 모습입니다. 정부 경제정책들에 최순실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본래의 정책 취지는 사라지고 의혹만 가득한 채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경제와 문화창조융합 사업에 최 씨의 입김이 들어간 정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 씨의 태블릿 PC에서 창조경제타운 구축 홈페이지 시안이 발견됐는데, 시안 발표 전에 유출된 흔적과 대통령의 관련 원고 수정 흔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창조경제 사업 전반에 최 씨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주는 건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정황도 많이 확인됐습니다.
최 씨의 측근으로 '문화계 황태자'로 군림했던 차은택씨가 창조경제추진단장과 문화창조융합 본부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전횡을 저질렀다는 증언들이 잇따라 나왔죠. 최 씨와 관련 의혹이 짙은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은 이 문화창조융합 사업에 주먹구구식으로 막대한 예산을 편성했다는 지적도 제기됐습니다.
본래는 창조경제 혁신센터를 통해 제2의 벤처 붐을 만들겠다, 그리고 문화창조융합벨트 구축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겠다, 이런 취지를 내세웠던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창조, 문화융합 이런 말은 모두 최순실에 따라다니는 꼬리표처럼 돼 있어서 경제 정책으로서의 자리매김을 못하는 상황인 겁니다.

A. 최 씨의 태블릿PC에 들어있던 200여 개의 파일에는 가계 부채, 개성공단 같은 정부의 정책 현안과 관련된 제목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계부채만 하더라도 A와 B라는 이름의 2개의 폴더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파일 내용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최 씨가 이런 정책 내용을 들여다봤고 어떤 형태로든 정책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겁니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행에도 최 씨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습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이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사퇴한 게 결국은 최 씨에게 밉보여서 그런 거다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죠. 더 나아가 그래서 한진해운 처리도 법정관리로 정해졌다는 주장까지 나온 겁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고 설마 이렇게까지야 했겠냐 싶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까지 최순실 프리즘 안으로 들어가서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 총체적으로 불신받는 정부 경제정책의 현실인 건 분명합니다.
Q. 경제정책에는 항상 돈이 따라가는 건데, 정책이 이렇게 일그러지면 세금도 제대로 쓰일 수가 없는 거죠?
A. 예산의 불투명한 집행과 낭비의 모습도 최순실 프리즘을 통해 보여졌습니다. 최 씨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권을 챙기는 데 나랏돈이 쓰인 정황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산이 책정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최순실표 정책들은 아무런 통제장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정해진 금액이 최 씨를 통해서 올라가면 정부예산에 그대로 반영됐다는 겁니다. 기획재정부가 제출한 이른바 '최순실 예산' 자료를 보면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최순실표 사업 명목으로 3,569억 원이 배정됐다고 합니다. 야당은 이보다 많은 5,200억 원에 달한다며 삭감을 벼르고 있습니다.
최순실게이트가 터지지 않았으면 줄줄 샐 세금이었습니다. 이런 사업 예산만이 아닙니다. 최순실 단골 성형외과가 개발하겠다고 제안한 봉합용 실은 최첨단 소재로 분류돼 예산 15억 원을 지원한다는 결정도 내려졌습니다. '국민의 세금이 최순실 복채냐', '내가 이러려고 세금을 냈나’ 촛불 집회에서는 이런 내용의 피켓들까지 등장했었죠. 굴절된 예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입니다.
Q. 최순실 꼬리표가 붙은 창조경제 사업들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돼있죠?
A. 창조경제, 문화융성, 융합 이런 말이 붙는 사업은 우선 도마 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선 시·도마다 설치된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돈 줄이 끊길 상황입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운영비를 지원해 왔는데 정부도 지자체도 예산 지원을 끊거나 삭감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당장 서울시가 서울센터에 대한 내년 지원 예산 20억 원을 백지화했죠. 경기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제출한 창조경제 관련 사업 예산도 국회에서 삭감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정부 임기가 끝나면 창조경제센터가 아예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해질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옵니다.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도 문체부가 이미 예산 86억 원 중 81억 원을 삭감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정부 예산이 투입되지 않으면 좌초될 수밖에 없습니다.

A. 국민이 아니라 권세를 섬기는 공직자들의 모습도 최순실 프리즘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경제수석과 정책수석이라는 국가의 중책을 맡았던 안종범 전 수석이 대표적이죠.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가 아니라 대통령의 집사 역할을 했습니다.
미르·K스포츠 재단을 만든다는 명분 아래 기업들을 겁박해 774억 원의 돈을 뜯어냈습니다. 안 전 수석이 두 재단 실무진들과 접촉하며 대기업의 기금 출연을 독려한 정황과 진술도 많아 나왔습니다. 차은택 씨 관련 비리에도 안 전 수석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차 씨의 지인을 KT 임원으로 취직시키고 중소광고업체가 인수한 옛 포스코 계열 광고대행사 지분을 차 씨 측이 빼앗으려 할 때 동조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Q. 안종범 전 수석만 이렇게 나선 게 아니었죠?
A. 조원동 전 경제수석도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을 쫓아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대통령 뜻이라면서 "너무 늦으면 난리 난다"고 까지 말한 녹취가 공개됐죠. 최 씨 모녀가 다닌 단골 성형외과 지원 방안에도 조 전 수석이 직접 나섰습니다.
경제를 살리는 데 앞장서야 할 고위 공직자가 오히려 권력을 동원해 반강제성 기부금을 걷고 기업을 압박하는 일에 앞장선 겁니다. 일선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들도 눈감고 귀 막으면서 결국은 방조를 한 셈입니다. 그러려고 공직자가 됐나? 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공직자들의 모습을 최순실 프리즘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A. 여전한 정경유착의 현실도 최순실 프리즘을 통해 비쳐졌습니다. 한국사회에 정경유착의 뿌리는 아주 깊습니다. 1988년 전두환 정권이 일해재단을 통해 기업의 돈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났었습니다. 1995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을 제공한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재판에 넘겨져 유죄를 받습니다.
당시 대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음성적 정치 자금은 내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었죠. 그렇지만 이후에도 1997년 국세청을 동원한 세풍 사건과 2002년 불법 대선 자금 사건에도 재벌기업들이 연루됐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전경련은 기업경영헌장을 발표하고 윤리 경영, 준법 경영을 강조했지만 이번에 또 미르와 K스포츠재단 사건이 터졌습니다.
Q. 기업들도 피해자 입장을 강조하지만 국민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지가 않아요.
A. 과거 정경유착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기업들은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습니다.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건넸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기업들도 정경유착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익을 취해왔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오너나 기업과 관련된 시급한 현안들의 해결 창구로 이용한 거 아니냐는 거죠.
가장 적극적으로 최 씨 모녀를 도운 의혹을 받고 있는 삼성을 살펴볼까요. 삼성이 독일로 돈을 송금하던 시기를 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라는 지배구조개편 이슈가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합병에 강력히 반대했고, 관련 기관에서도 반대 권고가 많았지만,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의 지지로 합병은 성공했습니다. 합병에 따른 통합 삼성물산의 순환출자 관련 공정위의 심사도 잘 풀렸습니다. 결국 삼성이 최 씨 모녀를 지원한 대가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승계 작업에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부풀어지고 있는 겁니다.

A. 롯데는 신동빈 회장이 독대를 했던 시기에 검찰이 신 회장의 비자금 의혹을 내사하고 있었습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이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로 수감돼 있었고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횡령과 비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이 집행유예 상태로 사면을 기대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부영은 올해 2월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던 중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K스포츠재단에 지원금을 내는 대가로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다 사정들이 있었던 거고 과거 경험도 있었던 만큼 권력에 기대서 문제를 풀어보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는 게 국민들의 시선입니다.
Q.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위중한데 언제까지 이런 프리즘으로 경제현실을 바라봐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A. 정상정인 경제상황도 비틀어 보이게 하는게 프리즘이죠. 불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결국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 공직자에 대한 신뢰, 기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하죠. 투명한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을 보여줘야 하는 거고, 기업들도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이런 식의 거래가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안팎으로 경제 위기가 가중되는데 현실을 비틀어보게 되는 이런 최순실프리즘을 빨리 벗어나 경제 위기를 헤쳐나갈 동력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차茶경제: 차(茶) 한잔의 여유.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듯 차병준 SBS 선임기자의 친절하고 품격있는 경제 해설을 만나 보세요.
* 기획 : 차병준 / 구성 : 윤영현 / 그래픽 : 정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