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공직자 부패, 돈세탁, 마약 거래와 인신매매, 탈세 등 온갖 굵직굵직한 범죄와 부정·비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겠지만 크게 줄일 수 있는 특효약은 고액권 지폐를 없애는 것이라는 제안이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은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공공정책학 교수입니다.
로고프 교수는 미국에서 고액권 지폐는 합법 활동보다는 불법 활동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며, 고액권의 점진적인 폐지를 통해 "현금 의존성"을 지금보다 크게 줄인 사회를 만드는 게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다음 달 출간되는 저서 '현금의 저주'에서, 현금 의존성을 줄인다고 해서 불법·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고 세금 탈루·불법사업을위한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액권 달러의 철저한 익명성, 휴대성, 유동성, 거의 세계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통용성이 불법 행태를 조장한다는 것엔 이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오늘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 글에 따르면, 미국의 탈세액이 1년에 5천억 달러(562조5천억 원)에 이르는데, 탈세의 상당 부분이 현금 위주 거래로 인해 매출과 소득신고의 진위를 가리기 힘든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고액권을 없애 수표나 직불카드, 전자거래로 지불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면 조세 당국의 세원 파악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현재 미국의 금융기관 밖에서 유통되는 돈의 거의 80%가 100달러(11만 원)짜리 지폐입니다.
로고프 교수는 우선 100달러짜리 지폐를 없애고 순차적으로 50달러와 20달러짜리 지폐를 없애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핵심 효과는 거액의 돈을 움직이고 저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100달러짜리 지폐로 100만 달러의 무게는 22파운드(10kg).
큰 쇼핑백에 들어가는 부피입니다.
이를 10달러짜리 지폐로 옮기고 저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에다 소액 거래의 현금 지급 한도를 정해두면 현금 사용을 더욱 줄일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다만 10달러, 5달러, 1달러짜리 지폐는 앞으로도 계속 유통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00달러 이상의 합법적인 거래에선 이미 현금보다 직불카드, 신용카드, 전자거래, 수표 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아직 10달러 미만 소매에선 절반 이상이 현금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금 의존성이 큰 저소득층에 정부나 금융기관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직불카드를 보급하는 것도 현금 의존성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태풍이나 기타 자연재해로 인해 전력공급이 끊기는 때를 대비해서도 소액권 지폐가 유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휴대전화 기지국이나 대형 소매상들은 대체로 비상용 자체 발전기를 갖추고 있어 정전 사태 때도 직불카드를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로고프 교수는 현금을 없애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저항과 반대는 내가 내 돈 쓰는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프라이버시 보호론일 것이라고 말하고, "이 개인 권리와 세금을 거두고 법을 집행해야 하는 정부의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가끔 200달러어치를 완전한 프라이버시 속에 사는 것에 대해선 우리 대부분 인정하지만, 5만 달러짜리 차를 사거나 100만 달러짜리 아파트를 사는 경우엔 탈세, 돈세탁, 부패 등의 문제들을 줄여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고액권 현금을 없애더라도 민간 부분에서 여전히 정부의 단속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익명 거래 수단을 찾아내지 않겠느냐고 자문하고 "그렇긴 하겠지만,정부가 그 대체 수단들이 나올 때마다 계속 단속하면 현금이 하던 역할을 못하게 할 수 있고, 범죄자와 탈세자들의 삶을 그만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자답했습니다.
로고프 교수는 현금 지폐를 폐지하기 위해선 고려해야 할 일들이 많긴 하지만, "점진적이고 적절하게 이뤄진다면 현금 의존성을 줄인 사회의 이점이 훨씬 클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실제로 여건상 때가 됐다"고 덧붙였습니다.
미국 행정부의 재정금융 부문에선 세율을 올리지 않고도 세수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절박하고, 국토보안 기관들은 현금의 익명성과 유동성 등으로 인해 테러리스트자금 조달이 쉬운 점을 우려하고 있으며, 법무부 쪽 역시 범죄와 현금의 관계에 대해 국토보안 기관들에 못지않게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 당국 입장에선, 고액권을 없앰으로써 고용주들이 몰래 임금을 지불하고 불법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을 막는 게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불법 이민 방지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금이 너무나 깊게 우리 생활과 경험에 파고들어 있긴 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현금 공급이 범죄자와 탈세자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며 적어도 100달러짜리 지폐만큼은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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