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야 참을 수 있지만, 물이 없어 바짝바짝 말라가는 농작물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커멓게 탑니다." "몇 년간 풍작인 벼농사가 올해는 일조량이 많아 예년 수준을 넘는 대풍이 예상됩니다." 7월 중순 이후 수십 일째 폭염이 이어지면서 과일과 고추, 콩 등 대부분의 농작물이 말라비틀어지는 등 큰 피해를 내 농심이 타들어 간다.
하지만 벼와 일부 과일은 폭염에 따른 일조량 증가로 당도가 높아지거나 작황이 크게 좋아지는 등 농민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린다.
이런 가운데 조생종 과일이 너무 일찍 출하돼 추석을 앞두고 물량수급에 혼선을 빚고 있다.
◇ 고추·콩·배추 등 대부분 밭작물 폭염 피해 최근 한 달 넘게 이어지는 기록적인 폭염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혹독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수확기를 맞은 고추가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들깨는 모종이 불볕더위에 새까맣게 말라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충북 옥천군 안내면에서 농사를 짓는 주도완(47) 씨는 "예년 같으면 어른 무릎 높이로 자랐어야 할 들깨가 아직 모종 상태에 머물고 있다"며 "20∼30%는 이미 말라죽어 수확이 불가능할 지경"이라고 한숨지었다.
개화기를 앞둔 콩에서는 꽃이 시들거나 갓 달린 꼬투리가 빠지는 피해가 나타나고, 배추와 무에서도 무름병이나 석회·붕소 결핍증 등 병해가 확산하는 추세다.
파종한 지 얼마 안 된 밭에서는 시듦 현상도 나타난다.
상추 등 시차를 두고 계속 수확하는 쌈채류는 맨 나중에 따는 '끝물 피해'가 심하다.
충북 충주시 농업기술센터 안문환 기술보급과장은 "끝물 상추의 경우 지면에서 30㎝ 이상 자라면서 더 높은 온도에 오래 노출되고 기력도 떨어져 폭염에 더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경북 안동시의 사과 농가에서는 과일 일소(日燒·과실 표면이나 농작물의 잎이 햇빛에 오래 노출되면서 화상을 입는 것)현상이 나타났다.
안동시 임동면 문준식(36) 씨의 3만3천여㎡ 사과밭에서는 그루당 열매의 최대 8%까지 일소 피해를 봤다.
일소를 피한 사과나무도 열대야 등이 이어져 일교차가 줄어들면서 당도가 떨어지는 피해를 보고 있다.
사과의 당도는 일교차가 클수록 높아진다.
안동시 와룡면 일대의 포도 농가에서도 일소 피해가 발생했다.
제철을 맞은 충북 영동산 포도는 잎에 수분을 빼앗겨 알이 오그라들거나 점무늬가 박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년 같으면 한창 살이 붙어야 할 배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군데군데 검은 반점까지 생기는 등 몸살이 심한 상태다.
◇ 벼·일부 과일 농사는 풍작 밭작물과 달리 벼 작황은 예년보다 많이 늘어나는 등 '대풍' 조짐을 보인다.
폭염으로 일조량이 늘고, 고온현상이 이어지며 병해충도 줄었기 때문이다.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병연 씨는 최근 폭염 속에 수확하며 풍년의 기쁨을 누렸다.
이씨가 수확한 '진옥 벼'는 수확 시기가 타 품종에 비해 빠른 편으로, 태풍이 오거나 병해충이 창궐하기 전에 수확할 수 있어 생산량이 많다.
추석용 햅쌀로 판매할 수 있어 일반 쌀보다 20% 이상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천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평년보다 주당 이삭 수가 22.2개로 전년보다 0.7개 많고, 이삭 당 벼알 수는 93.5개로 4.5개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며 "평년보다 수확이 늘 것"이라고 예상했다.
안동지역에서도 상당수 농가가 불볕더위에 한숨을 쉬지만 댐이나 큰 강 주변에서 물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벼 재배농가는 작열하는 태양 빛을 반겼다.
벼는 섭씨 32도가 넘는 고온이 계속되면 도열병 발생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안동 등 경북 도내 벼 농가들은 수확 때까지 태풍 등 재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올해 '대풍'이 들 것으로 기대한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인광1리에서 20만㎡가량 규모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종한(50) 씨는 "수확기에 접어든 일부 극조생종 벼는 폭염으로 작년보다 다소 수확량이 적은 것 같다"며 "하지만 도내 80%를 차지하는 중만생종 벼는 앞으로 태풍이 없고 날씨만 좋으면 대풍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기도 농업기술원이 최근 조사한 벼작황조사 자료를 보면 평균 초장(벼의 키)은 114.0㎝로 지난해 107.8㎝, 평년 103.5㎝보다 길었다.
이삭 당 낱알수도 92.0개로, 지난해 83.7개, 평년 85.3개보다 많았다.
㎡당 낱알수도 지난해 3만6천757개보다 많은 3만7천457개로 조사됐다.
도 농업기술원 관계자는 "통상 포기당 가짓수가 적으면 이삭 당 낱알 수가 늘어난다"며 "지금부터 태풍이 없고 기상만 좋다면 등숙률(낱알이 영그는 비율)이 높아져 올해도 대풍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참깨 농가도 비가 오지 않는 날씨를 반긴다.
수확량에 영향을 미치는 '청고병'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줄기가 말라 들어가고 잎이 떨어져 버리는 청고병은 수분을 매개로 번진다.
하지만 폭염 덕에 작물 주변에 수분이 줄어 청고병이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농민들은 보고 있다.
폭염으로 과일도 스트레스를 받아 당도가 떨어지는 사례가 많지만, 일부 지역산 과일은 일조량 증가로 당도가 높아지는 등 지역별 편차도 나타났다.
경남 창원청과시장에 따르면 폭염으로 조생종 과일인 아오리 사과가 예년보다 다소 일찍 출하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는 태풍이 없어 수확량도 예년보다 20%가량 늘었다.
폭염 기간 비가 거의 없고 일조량이 많아 노지 수박, 포도, 복숭아 등 여름 과일 당도는 그 어느 해보다 최고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달고 시원한 맛이 과일 소비량 증가에도 일조하고 있는 것으로 시장 측은 분석했다.
◇ 조생종 과일 너무 일찍 출하…추석 앞두고 혼선 폭염에 과일이 너무 빨리 익어 과수농가가 출하조절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름 과일인 복숭아는 만생종까지 조기에 홍수 출하되면서 농가들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연일 계속된 폭염에 8월 중순 이후 수확하던 만생 품종까지 모두 익어버려 농가가 서둘러 수확에 나섰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 농산물 도매시장 관계자는 "만생종이 열흘 가까이 앞당겨 출하되면서 하루 소화 물량의 2배 가까운 물량이 쏟아지고, 가격도 작년보다 20∼30%가량 떨어졌다"며 "유통기간이 짧고 저장성이 약한 복숭아가 폭염에 조기 홍수 출하되면서 끝물도 빨라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경북 김천의 자두 생산농가들도 홍수출하를 우려했다.
올해 봄 개화기 기상조건이 좋아 지난달 첫 출하 품종 생산량이 15%가량 증가한 데다 폭염으로 홍수출하 가능성이 커졌다.
저지대부터 차례로 수확해야 수급이 균형을 이루는데 장기간 고온으로 수확이 집중돼 가격이 지난해보다 30%가량 떨어졌다.
하지만 홍수출하 물량이 소진되고 나면 추석을 앞두고 과일 물량이 달릴 전망이다.
이 때문에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추석에는 제수용이나 선물용 과일 확보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사과와 배 등 과일은 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로 생육이 부진해 작년 추석 때보다 20∼25%가량 높은 시세가 형성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