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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아빠는 회사원·엄마는 가정주부…학교서 배웠어요"

[리포트+] "아빠는 회사원·엄마는 가정주부…학교서 배웠어요"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마트에서 장 보는 가정주부’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시 그림이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별에 따라 ‘정해진 역할’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직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의사와 자동차 제조업 종사자는 남성으로, 생선 가게 주인과 과수원 종사자는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교과서는 참정권이나 재판청구권 같은 중요한 국민의 권리를 설명할 때 항상 남성만 등장시킵니다. 판사는 물론이고,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국민 역시 남성이죠.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론장의 사회자와 정부 대표, 기업체 대표, 과학기술 전문가 모두 남성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학년을 막론하고 교과서 대부분이 표현한 남성의 직업은 의사와 운전기사, 어부, 정치인, 판사, 경찰관, 군인, 연구원, 과학자, 외교관이었습니다. 반면 여성의 직업은 미용사와 간호사, 요양 보호사, 교사, 디자이너, 모델 등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비중이나 영향력이 크다고 평가받는 직종은 남성이고, 섬세한 손재주나 보육과 관련한 분야는 주로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이죠.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인데도, 성별의 역할에 따른 고정관념이 여전히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교과서가 말하는 ‘남성’과 ‘여성’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초·중등학교 교과서 90종을 분석한 결과, 남녀를 구분 짓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염려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교과서에 스며든 편견은 광범위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성별에 따른 직업 차이는 일부분에 불과했죠. 가정 내 역할과 지위에 대한 편견은 물론이고, 외모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먼저 가족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엄마는 장보기와 요리하기, 간식 챙겨 주기, 밥 차리기, 집안 청소하기, 아이 돌보기, 가족 간호하기 등으로 묘사됐습니다. 반면, 아빠는 일하고 퇴근하는 모습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를 통해 남성은 주로 가정일보다 바깥일에 힘쓴다는 가부장적 가치관을 어린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아버지, 남성이 주도한다는 인식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예시를 들 때도 성별에 따른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욕설이나 악성 댓글, 해킹, 불법 다운로드 등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반면, 과시와 체면을 위해 값비싼 옷을 사 입고, 돈을 갖고 좋아하는 모습은 여성으로 그렸습니다. 이는 남성은 범죄 유혹에 약하고, 여성은 늘 과소비에 빠진다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내용 중에는 '외모'에 대한 편견도 있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은 눈초리가 올라가거나 주근깨가 있는 특징을 보여줌으로써 특정 외모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 국가인권위원회 용역 보고서 中 ]
“게임중독이거나 온라인에 악성 댓글을 쓰고, 개인 정보를 해킹하고, 범죄자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사람은 대체로 남자로 묘사되고 있고, 정돈을 잘하거나 쓰레기를 줍고, 예의가 바른 이미지는 여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특정한 성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갖게 할 우려가 있다고 봤습니다.”

● 편견이 담긴 교과서를 배우는 아이들

인권위 의뢰를 받아 교과서를 분석한 경인교대 설규주 교수 연구팀은 아이들이 과거부터 전해온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학습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대물림할 것으로 본 것이죠.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나 활동 범위가 남성과 비슷한데다, 성별에 구애 받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채 ‘여성은 이렇고 남성은 이럴 것’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은 불필요한 편견만 주입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교과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양성이 평등해진 현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별을 대하는 사회의 변화상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교과서 속 성별이 양적 측면이 아닌, 질적 측면에서도 균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어떤 주제를 다룰 때 성별을 감추거나 양성 모두 넣음으로써 편견을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려 넣을 때 될 수 있으면 성별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 형태나 그림자로 표현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성별을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학생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정도로만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성별이 반드시 등장해야 할 부분은 굳이 한쪽 성이 아닌, 양성의 경우를 고려해 각각 다른 시각에 비춰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도 말합니다. 남성이 바라본 시각과 여성이 바라본 시각을 각각 제시해 다양한 의견을 보여줄 수가 있다는 것이죠.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중요한 건 성별의 차별이 아닌, ‘식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설규주/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
“성별을 구분 짓는 데 있어서 차별과 식별이 자주 혼동되곤 합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일수록 이러한 부분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여성이 등장해야 하거나 남성이 더 등장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도록, 다음에 개정되는 교과서를 만들 땐 훨씬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기획·구성 : 임태우·김미화 / 디자인: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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