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장직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면서 타협점을 찾지 못했던 20대 국회 원 구성 협상의 분위기 반전이 감지된 건 어제(8일) 오전입니다. 현역 최다선인 8선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가미래전략 포럼 창립총회에서 한 축사 내용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서 의원은 포럼에 함께 참석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향해 “야당에서 국회의장 달라면 줘버리세요. 원 구성 놓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국회의장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서 의원이 당 내에서 유일한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됐기 때문에 이 발언은 새누리당이 국회의장직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야당을 상대로 실무 협상을 주도했던 김도읍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새누리당이 국회의장을 맡아야 한다”며, 그동안의 입장을 반복해서 강조한 직후라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서 의원이 던진 바통은 정진석 원내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받았습니다. 정 원내대표는 포럼에서 나온 직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교착상태에 빠진 원 구성 협상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국회의장직을 야당에 양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 결정은 서청원 의원의 용단에서 비롯됐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정해지는 대로 3당 원내대표가 만나 원 구성 협상을 마무리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새누리당의 결정에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7시간 뒤, 3당 원내지도부는 국회에서 상임위원장 배분을 비롯한 원 구성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만남부터 합의서를 작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9일) 오후 2시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장단을 선출하고, 20대 국회 개원식은 오는 13일에 개최하기로 합의한 겁니다. 20년 만의 3당 체제, 16년 만의 여소야대 구도 때문에 오는 9월 정기국회 전에도 개원이 힘들 거라는 예상은 다행히도 빗나갔습니다.
● ‘위법 개원’에도 쏟아지는 자화자찬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서로 통 큰 양보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여당이 양보를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당 내에서는 “더민주의 통 큰 양보는 효과가 없었지만, 새누리의 통 큰 양보는 꼬일 대로 꼬인 원 구성 협상의 실타래를 풀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더민주에 국회의장을 내줬지만 법사·운영·기획재정·정무·안전행정·미래방송통신·정보·국방위원장 등 국정 운영과 내년 대선을 위해 필수적인 8개 상임위원장을 맡아 실리를 취했다며, “이번 원 구성 협상의 진정한 승자는 새누리당”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더민주가 의장을 가져갔지만 우리 의원님들이 볼 때 (상임위 배분을) 너무 많이 양보한 게 아니냐고 서운해 할 것 같다”며, “더민주가 과감히 양보해서 원 구성을 정상화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완주 원내수석 부대표도 "어차피 투표를 하면 이래저래 승산이 없다고 보고 여당에서 포기한 것 같다"며, 여당이 주장하는 양보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결위를 가져간 것에 대해 "예산에 대한 더민주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라며, "19대와 달리 20대 국회에서는 예결위가 심도 있는 예산 심사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국민의당은 ‘캐스팅 보트’ 역할을 넘어 원내 1, 2당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을 먼저 결정하자는) 우리 당의 자유투표 제안과 '무노동 무임금, 특권 내려놓기' 제안에 국민 여론이 벌써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 두 명을 가졌으면 잘 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며, 협상 결과에도 만족감을 표시했습니다.
● ‘서청원 역할 변화’ 조짐…여권 속내는?
그런데 서 의원이 ‘국회의장 선거 불출마’로 갑자기 입장을 선회한 배경에 대한 설이 분분합니다. 지난 4.13 총선 당시 이른바 ‘2등’ 최고위원으로 선거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서 의원은 그동안 국회의장직과 관련한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국회의장직 도전을 염두에 둔 행보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여당 출신 정의화 국회의장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청와대와 서 의원 사이에 암묵적인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돌연 불출마 선언을 하자 서 의원이 국회의장 대신 당권 도전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자리를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서 의원이 후반기 국회의장직을 자연스럽게 차지하는 명분까지 확보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 의원 측은 “국회의장 문제가 걸림돌처럼 비치는 상황에 대해 부담감이 컸다. 협상의 길을 터줘야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라며, 과잉 해석은 자제해달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이번 협상이 신속하게 타결된 배경에는 여야의 내부 사정도 한몫을 했습니다.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문희상, 정세균 의원을 비롯해 당의 중추인 4-5선 중진 의원 너덧 명이 일찌감치 국회의장 도전을 선언하면서 원내지도부가 협상 초기부터 국회의장직을 상수로 놓는 전략만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새누리당은 임시지도부인 혁신비대위가 최근 여당 성향의 무소속 당선자 복당 시기를 원 구성 이후로 못 박으면서 원내 1당 복귀가 불가능해져 현실적으로 국회의장직을 사수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 “법 만들면서 위법 행위 반복…국민 우습게 보는 것”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해법도 이미 국회 스스로 제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18대 국회 김형오 국회의장 직속 국회운영제도개선 자문위원회와 19대 국회 정의화 국회의장 직속 국회개혁자문위가 각각 펴낸 보고서들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18대 국회 당시 국회운영제도개선 자문위원을 지낸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SBS와의 통화에서 “이들 보고서들은 국회 원 구성이 예측 가능하고 자동적으로 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며, “국회선진화법으로 도입된 예산안 자동부의제와 같이 원 구성도 일정 시점까지 협상이 마무리 되지 않으면 강제로 투표를 실시하는 방안 등을 명시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수는 “새 정치를 한다면서 국회 개원 때마다 위법, 편법을 일삼으면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국회의원 한 사람의 결단으로 마치 국회 원 구성 협상이 타결됐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는 현실이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신들이 언제라도 다수당이 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원 구성 관련 규정을 명문화, 제도화하지 않는 것은 정치권이 국민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여야 입장에서 보면, 오늘(9일)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장단을 선출하게 돼 법정시한(6월 7일)은 고작 이틀을 넘겼을 뿐입니다. 30년 만에 가장 신속하게 원 구성 협상을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4년 뒤 21대 국회에서는 ‘위법 개원’의 관행이 끊어질까요? 여야는 웃었지만, 국민은 여전히 찜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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