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를 찾아와 주민 30명을 교회로 모았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주민들을 기다린 건 일제의 참혹한 만행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은 제암리를 3.1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그곳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은 뒤 집중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까지 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외국인은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처참한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자료는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로 만들어졌고, ‘제암리 학살사건’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 스코필드 박사와 3·1만세운동, 34번째 민족대표
일제 만행을 세상에 알린 이 외국인은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였습니다. 영국 태생의 캐나다 수의사(수의학박사)였던 그는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세균학 교수가 없어 교육의 내실화를 기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애비슨의 편지를 받고, 낯선 타국 한국으로 달려왔던 겁니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지난 1919년 2월 어느 날, 그는 같은 장로교 선교사이던 앨프리드 샤록스의 소개로 이갑성(1886~1981)을 만납니다. 그리고 만남은 훗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됩니다. “조만간 전개될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수 있느냐”라는 이갑성의 제안에, 한국의 불행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스코필드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1915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갑성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합니다.)
3.1만세운동을 앞두고 이갑성은 스코필드 박사에게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고, 스코필드는 외국 신문과 잡지는 물론 외국인들을 찾아가 국외소식을 자세히 물어 그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로 뛰어다녔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에서부터, 군도를 휘두르며 진압하는 일제 헌병의 모습까지, 역사의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또, 화성 향남면 제암리-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해 증거를 모으고, 이를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으로 보내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이처럼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호랑이와 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공식 언론을 통해 스코필드 박사를 ‘과격한 선동가(Arch Agitator)’로 낙인찍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해 모국인 캐나다로 돌아가 다시 수의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혈액응고방지제'를 개발한 세계적 수의학자
스코필드 박사는 선교사,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세계적인 수의학자였습니다. 1907년 캐나다 토론토대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전 과목 A 학점을 받으며 수석으로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1911년 ‘토론토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인 검토’로 토론토대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21년엔 농장의 소들이 심한 출혈로 죽는 일이 자주 발생했는데, 그 원인이 '스위트 클로버'이란 걸 밝혀냈습니다. '스위트 클로버'엔 혈액응고를 막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었는데, 이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겁니다. 그의 연구논문은 미국 수의학회에 보고되었고, 이 연구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혈액응고방지제인 ‘와파린’과 ‘디큐머롤’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병리학 교수가 되었고, 1935년엔 독일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국제수의학회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수의학자로서도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 '마음의 모국'으로 돌아오다
수의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스코필드 박사는 ‘마음의 모국’인 한국을 잊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한국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며, 1958년 그는 독립한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힘썼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도 언제나 앞장섰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손수 편지를 보내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했고, 이 기금은 가난한 학생들과 보육원 등에 보내졌습니다. 또, 영어 성경반을 만들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와 함께 미래의 꿈을 가르쳤으며, 가난한 학생에게는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한국을 사랑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말을 부지런히 배웠고,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습니다. 석(石)은 돌과 같은 굳은 의지를, 호(虎)는 강자에겐 호랑이처럼 엄격하던 의지를, 필(弼)은 어려운 사람은 돕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가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 마이클 스코필드가 ‘석호필’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에 온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점을 기려, 국가보훈처는 그를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독립운동도 독립운동이지만, 그는 생전 언제나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대하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언제나 약자에 편에 섰으며, 누구보다 부정부패에 단호했던 그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의 대한민국, 영혼을 바쳐 사랑한 나라를 그는 지금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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