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참 곱고 예쁜 분이었습니다. 다만 이상하게 불안증이 심했던 것을 빼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셨고 매일 벽에 기대서 콧노래만 부르셨죠. 40대부터는 신경 안정제를 드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죠. 엄마가 절대 말씀을 안 해주셨거든요. 50여 년이 지나서야 엄마는 그 이유를 말해주셨어요.
네, 저희 엄마는 일본군 위안부십니다. 그 이유를 알았지만, 더 묻지는 못했어요. 차마 물을 수 없었어요. 서로 마음만 아플테니까요.
“배가 아파 죽겠네. (옆에서) '너 아기 뱄다' 여기(배) 뭐 있네 그러더라고. (낳은 아이가) 딱 이만한데 다리까지 있는데 다 썩었어.”
93년 고노담화 증언 청취 영상을 계기로 저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것에 큰 트라우마를 갖고 계신 분이, 저희를 낳고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하면 눈물만 흐릅니다. 다행히 오빠도 언니도 저도 모두 건강합니다. 하지만 더 힘든 게 있었죠. 바로 위안부 자식이라는 꼬리표. 그래서일까요. 유난히 언니는 엄마랑 말다툼이 잦았어요. 결국 오빠도 언니도 한국을 떠났어요. 위안부 엄마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을 감당하기 어려웠겠죠.
“내가 죄가 많아서 자식들한테… 다 내 죄다”
그럴수록 엄마의 자책은 점점 심해지셨어요. 10년 병수발을 했지만 저도 결국 한국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선택한 곳은 엄마를 망가뜨린 일본. 여기서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어요. 저는 엄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쏟아집니다. 엄마의 고통을 지금 저희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어요. 아직도 엄마가 벽에 기대셔서 부르던
슬픈 콧노래가 또렷하게 생각나요.
물새야 왜 우느냐
유수같은 세월에
원망을 말아라
<이 뉴스는 위안부 피해자 김경순 할머니의 딸 김미숙씨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카드뉴스입니다.>
(SBS 스브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