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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장' 독일광부보다 더 큰 외화 번 사람들 그란 카나리아에 잠들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옆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령 그란 카나리아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곳입니다.

아프리카 서부 해안으로부터 약 110㎞가량 떨어진 이 섬은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1970∼80년대 외화벌이의 일등공신이었던 원양 어선 선원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습니다.

1966년 11월 한국인 선원 40명을 태운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강화호가 그란 카나리아 주도 라스팔마스에 입항했습니다.

강화호를 시작으로 한국은 아프리카 인근 대서양 원양어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 등으로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지만, 원양어선 선원들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라스팔마스를 전진 기지로 대서양에서 고기잡이하던 선원 수는 1970∼80년대 전성기에는 한 때 1만 명이 넘었습니다.

선원들은 파도와 싸워가며 밤낮없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한국으로 보냈고 이는 고스란히 가난했던 나라 발전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라스팔마스 외곽 산나자로 시립 공동묘지 입구에서 50m가량 들어가면 푸른색 기와를 얹은 한국 선원 묘역이 나타납니다.

묘역 입구에는 한글로 '위령탑', '납골당'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곳에는 원양 어선을 타다가 선박 사고, 실족 등으로 목숨을 잃은 선원 124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습니다.

정부가 2002년 11만 달러(약 1억2천만 원)를 지원해 라스팔마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원들의 묘지를 이장해 만든 것입니다.

묘역 위령탑엔 박목월 시인이 1978년 남긴 다음과 같은 헌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1970∼80년대만 해도 원양어선 선원은 선망의 직업이었습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선원을 채용하면 대졸, 고졸의 고학력 지원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이들이 벌어서 고스란히 송금한 외화는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라스팔마스 총영사관 임태훈 해양수산관은 "그란 카나리아 진출 20년가량 지난 1987년 한 해 라스팔마스에서 한국 선원들이 1억1천만 달러(약 1천200억 원)의 외화를 벌었다"면서 "이는 독일에 파견됐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 한국이 원양어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1987년까지 21년간 총 8억7000만 달러에 달합니다.

이점수 라스팔마스 총영사는 "과거 선원들이 우리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그 누구보다 크다"면서 "그러나 이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불법 조업이나 하는 이들로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면서 아쉬워했습니다.

세계 각국이 어업 규제를 강화하고 한국에서 선원 지원자가 줄어들면서 그란 카나리아에서 한국인을 찾아보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한때 한국인 선원과 교민을 합쳐 1만5천 명가량 거주했으나 이제는 1천 명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이 같은 시대 흐름의 변화에 따라 그란 카나리아를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란 카나리아의 항만, 교통 등 수준 높은 인프라와 서아프리카 어장 접근성 등을 고려해 원양 어업뿐 아니라 수산 양식과 해양 플랜트 사업 확대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박희권 주스페인 한국대사는 "그란 카나리아의 장점과 한국의 앞선 수산 기술을 접목해서 수산 양식 분야 등에서 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라고 밝혔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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