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누더기 병역법'의 희생양 배상문

[취재파일] '누더기 병역법'의 희생양 배상문
최경주의 뒤를 이를 재목으로 꼽히는 골프스타 배상문이 중대 기로에 서 있습니다. 병무청은 지난달 30일 프로골퍼 배상문의 국외 여행기간 연장 불가를 공식 통보했습니다. 이로써 배상문은 오는 30일까지 입국해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병무청의 통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고민입니다.

병무청은 ‘1년의 기간 내에 통틀어 6개월 이상 국내에 체재’하거나 ‘3개월 이상 계속하여 국내에 체재하는 경우’에는 국내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으로 봐서 국외여행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배상문의 국외여행 연장 요청을 불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상문은 최근 국내 골프대회 출전과 대학원 진학 문제로 국내에 133일 동안 체류했습니다. 배상문측은 “2013년 하반기와 2014년 상반기에 국내 및 일본 투어에 참가하고 국내 대학원 등록, 친지방문 등의 사유로 출입국하고 체류한 적이 있지만, 이는 골프선수로서 신청인의 특수한 사정에 따른 것이므로 영주권 취득 후 미국에서 1년 이상 실질적으로 거주한 '국외 거주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배상문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통산 2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년 이상 선수 생활을 중단하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에 입대할 경우 올해 10월 국내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 아시아 대표 출전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이 사실상 무산됩니다. 내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의 메달을 획득하면 합법적으로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배상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입니다.
박주영_640
배상문이 곤경에 처하게 된 빌미를 제공한 사람 가운데 한명은 공교롭게도 축구스타 박주영입니다. 그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아스널 소속이던 지난 2012년 초 모나코 체류자격을 통해 사실상 병역 면제를 받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휘말렸습니다.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외국 영주권이나 체류 허가권을 받을 경우 그 국가에서 1년 이상 거주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37세까지 병역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박주영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이 군대에 안 간다면 내가 대신 가겠다”며 두둔했고 박주영은 그해 런던올림픽 동메달 획득을 통해 합법적으로 면제 혜택을 받았습니다. 비판의 화살이 병무청에도 날아오자 곧바로 국외 활동 스포츠 스타의 병역 의무 연기에 대한 법이 개정돼 2012년 12월 21일부터 적용됐습니다. 배상문은 법이 바뀐 지 한 달 뒤인 2013년 1월 미국 영주권을 땄습니다. 과거 규정에 따르면 배상문은 2014년 말 현재 취득 1년 이상으로 국외여행 허가가 났겠지만, 강화된 새 규정으로는 영주권 신규취득자로 분류돼 국외여행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배상문_500
이제 배상문의 선택은 2가지 밖에 없습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과 행정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상문은 국적 포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행정 소송은 승산이 별로 없습니다. 결국 병무청이 전향적 차원에서 국외여행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군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스포츠 스타의 병역 논란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02년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한국 축구대표팀 23명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똑같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습니다. 당시 규정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스페인과의 8강전 승리 직후 주장이었던 홍명보 선수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결국 목표를 이뤘습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면서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특혜를 누렸습니다. 축구와 야구 모두 일종의 편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이후 논란이 생기자 두 대회를 통해 얻는 혜택을 없애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출전한 야구대표팀은 준우승을 하고도 특례를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축구대표팀의 김기희 선수는 고작 4분만 뛰고 병역 면제 대상자가 됐습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구기 종목은 대표 선발 과정부터 ‘병역면제용’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1973년에 도입된 스포츠 선수들의 병역 혜택 규정은 수없는 개정을 거치면서 이미 ‘누더기’가 돼 버렸습니다. 특례를 받기 부족한 선수들도 병역법의 허점을 잘 이용하면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었고 반대로 특출한 재능을 갖고도 규정에 걸려 엄청난 손해를 봐야 하는 모순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란 개념은 사실상 사장(死藏)되어 버렸습니다.     

스포츠 스타라고 해서 일반 국민이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배상문의 경우는 누가 봐도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아예 군 복무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국외여행을 연장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주영에게는 37살까지 적용되던 규정이 현재 28살의 배상문에게는 안된다면 본인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 8월 리우올림픽때까지만 국외여행을 한시적으로 연장해주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듯싶습니다. 그것만이 배상문이 ‘누더기 병역법’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