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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쪽지' 국장과 '땅콩' 직원

'위계'가 '정의'가 된 시대

[취재파일] '쪽지' 국장과 '땅콩'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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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싸움으로 몰고 가야”

지난 5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는 이렇게 쓰인 쪽지 한 장 때문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여야 국회의원들과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문답이 진행되던 차, 문체부 우상일 체육국장이 김종 제2차관에게 쪽지를 건넨 게 화근이었습니다. 당시 의원들은 김종 차관이 청와대 이재만 비서관과의 친분으로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집중 추궁할 예정이었습니다.

쪽지가 발각되자 의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국민의 대표를 싸움 붙이라니, 이런 건 건국 이래 처음 본다.”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여기가 무슨 투우장이냐, 투견장이냐.” (박주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질타가 이어졌고 결국 정회가 선포됐습니다. 쪽지를 쓴 주인공 우상일 국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기자들이 국회 본청 정문까지 쫓아가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오후에 재개된 교문위 회의, 우종일 국장은 “윗분을 모시는 마음에”라고 해명했습니다. 회의 내내 우 국장의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우 국장은 김종 차관에게 필요한 내용을 귓속말로 전달하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건네주는 등 참모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랬습니다. 국민의 녹을 먹는 고위 공직자라지만, 우 국장에겐 여야 싸움에 이력이 난 국민보다는, ‘윗분을 모시는 게’ 먼저였습니다.
대한항공 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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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임원은 기내 서비스와 안전에 점검할 의무가 있습니다. …… 철저한 교육을 위해 서비스 질을 높이겠습니다.”

지난 8일,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여론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자, 대한항공은 이런 입장 자료를 냅니다. 입장자료 순서를 간단히 요약하면 첫 번째, 일단 승객에게 사과, 두 번째,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사무장 질타, 세 번째, 기내 서비스에 대한 임원 노력의 당위성, 네 번째, 직원들에게 대한 철저한 교육 다짐, 이랬습니다. 쉽게 풀어쓰면, 승객하게 죄송하긴 한데, 사무장이 잘못했고, 땅콩 회항의 주인공 조현아 부사장은 제 역할을 했던 것이므로, 직원들 서비스 교육을 제대로 시키겠다는 겁니다.

여론이 들끓었던 이유가 조현아 부사장의 ‘갑질 논란’ 때문이었다는 건 초등학생도 알만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숙한 서비스를 사과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가 잘못하면, 세자를 모시는 내관이 대신 회초리를 맞았다죠. 사과문을 쓴 대한항공 직원은 이런 식의 유체이탈, 논점일탈 화법을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해명자료를 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과문을 쓴 대한항공 직원에겐, 화가 난 국민 보다 ‘부사장님의 안녕’이 먼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 당연히 분노가 치밉니다. 윗분을 위해 국민 대표 기관의 싸움질을 부추겨야 한다는 고위 공무원의 몰지각한 발상, 윗분의 책임마저도 아랫사람에게 전가시켜 물 타기 하려는 대기업 직원의 노예근성, 그 뒤에 국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연민이 느껴집니다. 공감까지 느껴진다면, 너무 나간 걸까요.

폭언 조현아_640

위계가 정의가 된 시대

시대는 이런 소통 방식을 당연하리만큼 훈육해 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세대는 장학사님 오시는 날이면 수업까지 반납하고 나무 바닥을 왁스로 박박 문대야 했습니다. 수업권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나무 바닥을 힘껏 문대다 고사리 같은 손에 가시가 박혀 피가 흘러도 억울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를 미처 알기도 전에, 우리 세대들은 장학사님이 참 높은 분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다쳤냐며 물어보던 양호 선생님은 장학사님 이야기를 하자, ‘좀 조심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윗분을 위해선 다쳐서도 안됐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군 시절, 부대장 가족은 주말마다 관사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종교행사 시간, 하지만 전날 밤 삼겹살 파티의 뒤치다꺼리는 장병들의 몫이었습니다. 간부는 너무 당연하듯 작업자를 소집했고, 청소를 시켰습니다. 우리는 역시 당연하듯 상을 치워드렸습니다. 밤새 말라비틀어진 삼겹살을 주워 먹으며 작업자로 끌려오길 잘했다, 좋아하던 녀석도 있었습니다. 청소의 대가는 부대장 사모가 건넨 자양강장제 한 병과 소보로빵 하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헌납한 우리는 그걸 또 좋다고 먹었습니다. 높은 분의 편의는 기본권에 우선했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수업보다, 종교의 자유보다 윗분이 먼저라고 교육받았던, 그게 융통성이라며 소통했던 시대. 어쩌면 ‘쪽지’ 국장과 ‘땅콩’ 직원은, 거울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의 조각조각이 그 어떤 사건보다 감정선을 격렬히 건드렸던 건 특정 개인의 몰지각함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험하게 교육받고 거칠게 소통했던 시대에 대한 분노가 반, 그럼에도 알아서 길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연민이 반입니다. ‘위계’(位階)와 ‘공리’(公利)의 갈등 속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위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을’ 들의 모습, 그렇기에 마냥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게 또 우리입니다. 쪽지와 땅콩은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푯값일 뿐이었습니다. ‘쪽지’ 국장과 ‘땅콩’ 직원, 모두 남 같지가 않습니다. 처량하고 안타깝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행여 위계로 후배들을 강요하고 닦달한 적은 없었는지 저부터 반성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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